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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
황지호x조의신
조의신은 교실 문을 열었다. 등교가 조금 일렀던 탓인지 교실은 아직 텅 비어 있었기에, 창문을 가리던 커튼을 걷어 환기를 시키고는 본인의 자리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열린 창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물론 학교의 설비가 설비인 만큼 점점 더워져 가는 날씨에 맞춰 좋은 성능의 에어컨을 작동 시킬 수도 있었지만, 역시 그냥 자연풍을 맞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 조의신은 제 오른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에 칭칭 동여매어져 있는 가느다란 붉은 실을.
"……하아."
당연하게도 이 실은 보통 실이 아니었다. 일반인은 물론, 플레이어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특별한 붉은 실. 바로 월하노인(月下老人)의 실이었다. 이 땅을 근본으로 하는 설화는 아니나 한국에서도 강한 힘을 발휘하는 상위존재의 실이 왜 조의신에게 있느냐. 이야기는 이틀 전으로 돌아간다.
※
모처럼 느긋한 휴일이었다. 바쁜 일도 다 끝났겠다, 슬슬 흑막을 막기 위한 다음 수를 생각할 때라 판단한 조의신은 원활한 정보 공유를 위해 호랑이 저택으로 향했다. 황지호가 데리러 온다는 건 거절했다. 엎어지며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기숙사까지 에어 택시를 보내겠다니, 노친네의 돈 지랄은 암만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최근 황지호를 보면 묘하게 가슴이 술렁거려 그와 단 둘이 있고 싶지 않았지만.
잠들기 직전 그가 생각났다. 만약 자신이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밤새 황지호 얼굴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강렬하게. 그렇게 질색하던 웃음소리가 종종 귀에 아른거리고, '처'웃는다 표현했던 표정 하나하나가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내가 황지호를? 명백한 단서들 앞에서도 조의신은 '설마'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막상 실제로 보면 평소랑 별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주수혁과 안다인처럼 눈만 마주쳐도 어쩔 줄 몰라 하고, 뭐 그런 게 연애감정 아닌가? 조의신은 단순히 자신이 피곤할 가능성부터 정신계 이능에 당했을 가능성까지 점쳐봤다. 만일 후자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저택이 가까워졌다.
-왕! 왕왕!
"올무야! 세상에, 마중 나와 준 거야?"
왕! 끄웅-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더운데 힘들었겠다. 얼른 들어가자!"
"조의신. 난 보이지도 않는 건가?"
신수와 함께 나와 있던 황지호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조의신은 그저 제 천사를 이 더운 날 기다리게 했단 죄책감 밖에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신화계 호족을 진심으로 걱정할 일이 별로 없… 만일 백호군이 나와 있었다면 미안해했을 거 같긴 하다. 역시 황지호한테는 아무 감정 없는 게 맞나보네. 조의신은 내심 안도했다.
"미안해.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계속되는 사과에 신수는 괜찮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황지호는 그 꼴을 지켜보다 고개를 저었다. 에너미 앞에서도 침착한 놈이 어찌 신수만 보면 저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든가 말든가 조의신은 열심히 올무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됩니다.>
운명력? 여기서? 갑자기 멈춘 탓에 신수와 황지호가 동시에 조의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꾸해줄 틈도 없이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옛날 유상희의 광림에 휘말렸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아니나 다를까 호랑이 저택은 물론, 황지호와 신수의 기척도 사라져있었다. 대신 조의신의 앞엔 눈을 가린 두 존재가 미소 짓고 있었다. 연령도, 옷차림도 다르지만 둘 다 상위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안녕! 얘기 많이 들었어!]
올리브색 곱슬머리를 한 아이가 날갯짓하며 말했다. 얼핏 보기에 막내 은재호보다 더 어려 보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 쥐고 있는 납화살은 아마 다프네의 심장을 관통했던 그 화살이겠지.
"안녕하세요."
[듣던 대로 예의바른 아이구나.] 긴 수염의 노인이 인자하게 말했다.
대체 상위존재들 사이에 무슨 말이 도는 걸까. 잠시 고민한 조의신은 이내 노인의 모습을 살폈다. 중국 신선 같은 풍성한 옷자락 사이로 붉은 주머니가 언뜻 보였다. 에로스와의 연관성을 떠올리자 금세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월하노인(月下老人), 그리고 당신은 에로스(Eros) 맞죠?"
[맞아! 역시 바로 맞출 줄 알았어!] 에로스가 허공에서 빙글 돌며 말했다.
어린아이 모습이라 그런지, 지금껏 봐왔던 상위존재들보다 발랄했다. 하지만 상위존재는 상위존재. 은은히 풍겨나오는 위압감에 조의신은 긴장을 풀지 않고 물었다.
"사랑의 신들이 저를 왜 찾아오신 거죠?"
[거창하게 말하면 세계를 위해서고~]
[가볍게 말하자면 네게 반려를 내려주기 위해서지.]
"-네?!"
이게 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린가. 조의신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뒤늦게 소리 질러 죄송하다 사과하니 두 신 모두 괜찮다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상위존재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꽤나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반… 그게 무슨 소리 입니까?"
[네 존재를 이 세계에 더욱 강하게 뿌리내리기 위함이란다.]
그들의 설명은 이랬다. 본디 각 차원은 서로 교차할 수 없는 게 기본이었다. '교차'에는 다른 세계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포함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계충돌 급의 충격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조의신은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틀을 씀으로써 무사히 이 곳에 안착할 수 있었다. 일종의 편법이었다.
[하지만 슬슬 한계인거지.]
지금 이 세계는 플마고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정화 되어있었다. 그러나 흑막이 계속 존재하는 이상, 언제 조의신을 보호하던 힘이 거두어져 그의 영혼이 붕 뜰지 몰랐다.
[그러기 위해 네 혼을 이 세계의 존재와 엮어주려는 것이다. 반려는 서로의 혼을 잇는 존재니.]
[싫으면 거절해도 돼. 하지만 넌 그러지 않겠지? 이 세계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너라면.]
맞다. 조의신이 저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꿈도 희망도 없던 그 좃망세계까지 사랑했던 그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에게 아주 작은 먹구름이라도 허용할쏘냐. 조의신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선택권을 주마. 이 자의 화살을 선택하면 누구든지 네게 사랑을 느낄거란다. 너 또한 단번에 사랑할 수 있겠지.]
…아니. 그건 좀 곤란한데. 난감해하는 조의신 옆에서 에로스가 눈을 빛내며 '사랑은 화끈해야지!'라고 외쳤다.
[반면 나는 사랑의 '감정' 자체를 주진 않을게다. 단지 네 운명의 짝이 누군지 알 수 있게 해줄 뿐이지.]
얼핏 들으면 에로스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조의신은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큐피드의 화살은 맞는 순간부터 감정적인 컨트롤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월하노인의 실은 제 페이스대로 관계를 이끌 수 있었다. 어차피 운명이라면 이어질 터이니, 상대가 누군지 확정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메리트가 있었다.
"저는 월하노인의 힘을 받을게요."
에로스가 미간을 좁혔다. 본의 아니게 상위 존재의 심기를 거스른 꼴이라 조의신은 살짝 긴장했으나 다행히 에로스는 별 말 없이 뒤로 빠졌다. 조의신이 안도하는 것을 본 월하노인이 허허 웃으며 손을 뻗었다. 곧 노인의 손 끝에서 피어난 붉은 빛이 조의신의 오른손에 스며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시야가 하얘졌다.
왕왕!
"조의신! 괜찮은가?"
퍼뜩 정신을 차리니 올무가 낑낑대고 있었다. 황지호 역시 이능파를 끌어올렸는지 머리색이 황금색으로 변해있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마주 본 조의신은 순간 의아해졌다. 황지호는 운명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 오늘은 눈치 못 챈 건가?
"무슨 일이지? 몸이 안 좋은 거라면 향록을 부르겠다."
"아니야. 상위존재들이 잠깐 찾아왔었어."
"상위존재'들?' 누가, 무슨 이유로?"
"별 건 아니고……"
조의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걱정스레 뻗은 황지호의 손 아래로 붉은 실이 길게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설마. 떨리는 눈동자로 황지호의 실을 따라가니 그 끝엔 조의신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있었다.
"조의신?"
맙소사.
"역시 상태가 이상하군. 우선 저택에 들어가 은호의 진찰을 받아라. 그 사이 향록을 부를 테니 맞춤 영약을…"
내, 운명의 짝이… 황지호라고? 그 순간 모든 생각이 날아갔다. 가슴팍에 머리를 대고 있던 올무가 이상함을 느끼곤 왕! 하고 짖었다. 덕분에 조의신은 제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지금껏 자신이 제 감정을 모른척 해왔다는 것도. 10 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켜본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달리, 황지호는 고작 1 년 남짓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의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자신은 무서웠던 것이다. 잘못해서 황지호와의 관계가 어긋날까 봐.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번지는 감정에 조의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렇게 인정하고 싶진 않았는데. 황급히 올무를 내려놓은 조의신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저 귀 밝은 노친네에게 제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미안. 나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할거같아."
"뭐?"
"갈게."
조의신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혜지의 광림과 민그린의 스킬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환한 대낮에 탁 트인 정원에서 써봤자 별 효과없는 짓이란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우선 황지호가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잠깐, 조의신-!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의신은 돌아보지 않고 기숙사까지 내달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인영을 향해 신수가 애타게 짖었다. 왕? 왕왕! 왕왕왕! 아무리 불러봐도 조의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내 신수는 믿을 수 없단 얼굴로 털썩 주저앉고 황호의 바짓단을 물어당겼다. 빨리 데려오라는 뜻이었다. 신수와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하던 황호는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모인 이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은호에게 조언을 구하도록 하지."
끄웅… 결국 신수는 터덜터덜 발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며 황호는 은인의 떨리던 눈동자를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평정을 잃은 조의신은 처음 보았다. 당장이라도 기숙사에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그는 인내했다. 조의신이 순순히 잡힐 리 없을 뿐더러, 오늘같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 뒤엔 반드시 이유를 설명해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황호는 제 디바이스를 꽉 쥐었다. 언제든지 은인의 연락을 받을 수 있도록.
※
호랑이 저택에 비상이 걸렸다. 주말 내내 그들의 은인이 모든 연락을 씹었기 때문이다. 황호의 연락을 무시할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던 호족들은, 조의신이 적호와 김신록, 은호의 연락까지 무시하자 정색하고 황호를 추궁했다.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것이 황호였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대체 조의신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황호?"
"왜 당연히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평소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십시오."
황호가 억울해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나 김신록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백호와 은호는 무표정으로 차를 마실 뿐이었다. 적호는 그것 보라는 듯 턱을 까닥였다. 황호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여기에 내 편은 아무도 없군. …응? 뭐야, 이 망할 달토끼가 왜 연락을-"
미간을 찌푸린 채 디바이스를 킨 황호가 벌떡 일어났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황호에게 향했다.
[황호 나 은호의 후예들 보고싶은데 애들 데리고 나와라]
[아니면 내가 그쪽으로 가도 되고]
[야! 씹지 말고 대답해!]
[은인만 안 바쁘면 걍 은인한테 부탁할텐데… 걔는 주말인데 뭐가 그리 바쁘대? 너 은인 부려먹니?]
"…아무래도 의신이 형은 저희 연락만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은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화함이 사라진 침착함은 공포에 가까웠다. 은빛 눈동자가 천천히 자신을 향하자 황호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어제 오전까진 이 곳에 오려하셨던걸로 보아, 의신이형에게 문제가 생긴 건 황호님을 만난 직후일 거예요. 정말 아무 일이 없었나요?"
"그래. 어제 말했다시피 상위존재들이 접촉했다는 말 뿐이었다. 그러고…"
날 보고, 도망간 거였나…? 그저 달아났다고만 여겼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분명 조의신은 뭔가 전하려다 말을 멈췄다. 그리고 저를 몇 초간 바라보다 갑자기 돌아가야겠다고 했지. 설마 날 피하는 건가? 황호가 딱딱히 얼굴을 굳혔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 보네요."
"……."
"마음 같아선 직접 찾아가고 싶지만 '천은하'가 무명의 초신성을 찾아가는 건 너무 눈에 띄어요. 저는 기숙사생도 아니니까요." 그러니 부탁드려도 될까요, 황호님?"
은호가 부드럽게 물었다. 전 수장의 압박감을 느끼며 황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은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조의신이 자신을 피하고 있단걸 안 이상 그냥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이틀이면 많이 참지 않았나. 황호의 시선이 은광고 기숙사 쪽을 향했다.
※
다시 현재로 돌아와, 서서히 소란해지는 바깥을 느끼며 조의신은 고개를 들었다. 슬슬 등교 시간이구나. 손가락에 묶인 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분명 실체가 없을 텐데도. 멍하니 물리법칙 따위를 생각하던 조의신은 현실도피를 관두고 한숨 쉬었다. 이걸 황지호한테 말하긴 해야 할 텐데…
"일찍 왔군, 조의신."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조의신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암만 딴 생각 중이었다지만 플레이어의 청각으로 문 여는 소리 하나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이사장의 직권을 이런데 쓰지 말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황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연락은 왜 안 받았지?"
'우리'라는 단어에 뼈가 실려있었다. 아무래도 호족의 연락만 무시한 걸 들킨 모양이었다. 다른 호랑이들에겐 미안했지만 조의신은 제 마음을 다잡기 전까진 호족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눈치 빠른 호랑이들은 분명 조의신의 시선이 누굴 향하는지 알아챌 것이다. 조의신은 날 것 그대로를 내보이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약간의 두려움과, 정리되지 못한 마음을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미안."
"그럼 질문을 바꾸지. 혹시 그 날 도망친 이유가 '나' 인가?"
흠칫- 조의신의 반응에 황지호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했더니 진짜였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한 번 푹 숙였던 그는 잠시 후 진지한 눈빛으로 조의신을 응시했다.
"혹여 내 행동에 불쾌했던 점이 있다면 말해다오. 앞으론 네 의견을 존중하겠다."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조의신은 눈을 깜빡였다. 황지호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날 다짜고짜 자리를 피해버린 건 조의신 자신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불쾌해 할 줄 알았는데… 황지호는 추궁하는 대신 스스로를 낮추고 조의신의 기분을 먼저 헤아려주었다. 새삼 그가 얼마나 자신을 신경 써주는지 느껴졌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은인이기 때문에 잘 해주는 거야?"
"뭐?"
"넌 진족이고, 한 종족의 수장이기까지 하잖아. 한낱 인간을 이렇게까지 배려해 줄 이유는 없어."
한낱… 황지호가 인상을 구긴 채 중얼거렸다. 그러다 이내 아연한 얼굴로 천장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했다.
"단순히 은혜를 갚으려는 의도만으로 우리가 널 좋아한다 생각하는 건가?"
"……."
"우리의 은인은…아니, '내' 친우는 정말 가혹한 면이 있군."
처음 듣는 소유격에 검은 눈동자가 커졌다. 그 얼굴을 보며 황지호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품는 호의에 은인이라 불리게 된 일들이 없다곤 하지 않겠다. 하지만 마음이란 건 그렇게 무 자르듯 딱딱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게임마냥 네 선행에 따라 호감이 1 씩 적립된다 생각하나? 아니란 건 명석한 네가 더 잘 알겠지."
"……."
"너와 함께한 시간들을 통틀어 널 좋아하는 거다. 우리 모두가 그래. 물론 나도… 호족의 수장이 아닌 황호라는 개인으로써 말이다."
멍하니 황지호의 말을 듣던 조의신은 마지막 대사에 눈을 크게 떴다. 얼핏 흘려듣기엔 '단순히 수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널 좋아하는 게 아니다.'라고 들렸다. 그 순간 목소리를 살짝 떨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조의신이 말없이 바라보자 황호가 시선을 피했다. 눈에 띄게 어색한 행동에 조의신의 마음에 '설마…?' 하는 마음이 번졌다.
"그 날 내가 만난 상위존재는 둘이야. 하나는 월하노인, 다른 하나는 에로스."
"둘 다 인연과 관련된 신이군. 그들이 갑자기 왜 널 찾았지?"
"…나한테 반려를 찾아주겠대."
그 말에 이번엔 황지호의 어깨가 파득 튀었다. 조의신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아무렇지 않은 척 진정했지만, 한 번 떠오른 의심에 불을 지피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 조의신의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반려와 영혼을 묶어야 내가 안정적으로 이 세계에 머무를 수 있을거래. 해서 둘 중 한 신의 도움을 택하라길래 월하노인을 선택했고, 지금 내 손가락엔 붉은 실이 매어져 있어."
조의신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을 황지호가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만약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간다면, 조의신은 여기서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지호의 눈동자는 명백히 떨리고 있었다. 수천 년 먹은 노친네가 자기 마음을 숨기지 못할 만큼 동요했단 뜻이었다.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그 말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조의신은 결심했다.
"황지호. 안광을 사용해 봐."
"안광을?"
황지호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나 순순히 은인의 말을 따라 안광 스킬을 발동시켰다. 황금색 이능파가 그의 눈에 서렸다. 곧이어 붉은 실을 발견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천천히 실을 따라가다 제 손가락을 보곤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어…? 이게, 설마-"
"반려로써 인간은 별로야?"
황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예전 청호와 신인의 정체를 알았을 때 보다 더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서서히 그의 얼굴에 열이 번졌다. 저게 귀여워 보이다니, 내가 미쳤구나. 조의신은 스스로를 어이없어하며 피식 웃었다. 그 소리를 결정타였는지, 황지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륵 달아올랐다.
"그럴 리가 있나! 아니, 근데 정말로 내가 네 반려라고…?"
"상위존재가 묶어준 실이니 틀림없어."
"그, 그렇지. 월하노인은 신격 높은 상위존재니 거짓일 리가 없지-"
횡설수설하던 황지호가 드디어 진정하고 활짝 웃었다. 그의 눈엔 기쁨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혹은 막연하게 우정이라 생각했던 호의들이 사실은 애정이었음을 조의신은 이제야 깨달았다. 매일같이 오던 연락도, 귀찮을 정도로 들이대던 관심도 전부 다.
"미안해. 그 동안 내가 너무 무신경하게 굴어서."
"아니, 아니다.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군. 아, 이제부터 안광을 상시 발동시켜야겠어."
"진족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낼 거 아니면 그만둬."
"상관없는데."
"…주책이니까 하지 말라고!"
황지호는 언제 쑥스러워 했냐는 듯 '하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한 소리 할까 싶다가, 그가 너무나 행복하게 웃고 있어 조의신은 고개를 저었다. 늘 듣던 웃음소린데 오늘따라 다르게 들리는 건 왜일까. 결국 조의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마주 보던 둘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이내 붉은 실 두 가닥이 하나로 엉켰다.
"좋은 아침~ 둘 다 빨리 왔네!"
"부반장 왜 아침 안 먹고 먼저 갔냐. 오늘 한식 개맛있었는데."
"양식도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은광고 학식은 정말 수준 높아요. 벌써 졸업후가 걱정된다니까요."
잠시 후, 0 반 아이들이 등교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두 사람이 깍지 낀 모습은 보지 못한 듯했다. 약간의 아쉬움을 품고 떨어지며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다시 평범한 색으로 돌아간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쑥스러움에 홱 고개를 돌렸지만, 조의신은 아침 조회시간 내내 제 새끼손가락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어느 평범한 하루의, 평범하지 않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