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커플, 괜찮을까요?
냉동참치
황지호x조의신
드르륵.
조의신이 교실 문을 열자 주말 내다지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던 교실의 해묵은 공기가 울렸다.
이른 등교였는지 교실은 텅 비어있었고, 조의신은 그런 교실을 가로질러 커튼을 걷어 환기를 시켰다.
조의신이 자리에 앉자 바람이 선선히 불어왔다.
황호가 학교설비에 이것저것 투자하는 만큼, 점점 무르익어가는 날씨에 맞춰 에어컨을 작동시킬 수 있었지만, 역시 자연풍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인공적 공기는 영 안 맞아서.
습관적으로 턱을 쓸어내리다가,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오른손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새끼손가락에 칭칭 동여 매어져 있는 붉은 실을.
그 실은, 곧 끊어질 듯 가늘었다.
처음에는 저주라도 걸린 것인가 싶어서 아이템으로 갖은 용을 써봤는데,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되려 아이템만 날린 꼴이 되어 여태껏 방치 중이다.
'... 어쩌면 또 초상우주의 짓일지도.'
초상우주가 언제 말을 해주고 무언가를 해줬었나.
물론, 상태창 쯤은 띄워줬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 흠."
눈에 거슬리는 것 말고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이정도로 안 지워지는 것을 보니 황지호에게 말해봤자 별다른 방도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기회만을 노리고 벼르고 있지 않을까?
"뭘 그리 깊게 생각하지? 조의신."
"...!"
"... 왜 그렇게 놀라는 건지 궁금하군. 내 생각이라도 했나?"
"안 했어."
대체 언제 온 거지?
너무 깊게 생각해서 문 여는 소리도 못 들었다니. 다음부터는 문 쪽이라도 보고 있어야 하나.
"섭하게도 단정 짓는군. 그렇다면, 또 무슨 일이 생겼나? 또 어딜 다녀온 건 아니겠지."
"아직 안 다녀왔거든? 별거 아니니까 신경꺼."
그렇게 말하자 황지호는 잠잠해졌다.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심각해져서 달려들기 전까지는.
"아직이라고 말했나?"
"... 어?"
"또 어딜 갈 예정인가 보군?"
"... 아니...?"
"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군."
어디서 또 용화법을 배워와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지.
누군가 와줬으면 좋겠는데. 예를 들어, 한이라던지, 유리라던지...
곧 올 시간이 되지 않았나?
"또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군. 하여튼 거짓말은 얼굴에 티가 다 나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네가 하는 일에 간섭은 하지 않겠다만..."
"어디서 다쳐오면 용궁에서 준열이의 눈빛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아, 오늘따라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자꾸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이 튀어나온다. 용제건은 또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문자왔숑!
"..."
"..."
"준열이지?"
"... 네."
타이밍 좋게 우리 제자님까지.
"난 의신이가 알아서 제 몸 간수할 줄 안다... 고, 생각해. 그렇지?"
"... 예."
"흠, 그렇다면 나도 뭐 하나 말해볼까."
"... 뭘?"
"다쳐온다면 영약으로 탕을 만들어 담궈주마. 아, 신수가 주관할거다."
"... 맙소사."
우리 올무의 눈초리를 받으며 지내라고?
"잘... 간수하기를 바란다. 그 한 몸."
"... 그래."
그렇게 얼마나 협박 아닌 협박의 압력 속에서 조리돌림을 당한건지. 슬슬 정신이 어지러워질 무렵, 유리와 한이가 왔다.
"좋은 아침."
"안녕. 둘이 먼저 와 있었네? 어, 안녕하세요. 제건 선생님도 일찍 오셨네요."
그렇게 담화의 주체가 내가 아닌 유리와 한이로 넘어갔다.
황지호는 자뭇 아쉬운듯, 내 쪽을 힐끗 봤지만, 어림도 없지.
용제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말을 받아주고 있었고.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착하네.
... 은근한 압박도 잘하고. 방금 힐끗 날 쳐다봤다.
나는 대충 무시하며 디바이스를 켰다.
"...?!"
무려 귀여운 홍룡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맑을 예정이에요.
-아, 그리고 이번에 스탬프가 새로 나왔는데, 스승님께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움짤인가? 꼬리를 붕붕 흔드는 홍룡이 깜찍했다.
나는 이번 스탬프가 매우 귀엽고, 오늘도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문자를 보냈다.
.
.
.
"조의신?"
"... 왜?"
"신수가 기다리고 있다."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아니, 이럴 때가 아니라, 올무 주려고 산 꼬까옷을..."
"... 그새 또 뭔가를 샀었나 보군. 과소비는 멈추라고 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들고왔을텐데.
그렇지만 올무가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간단한 요깃거리로 마카롱 몇 개만 사갔다.
"올무야!"
-왕!
왕왕거리면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따뜻해진다.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아.
"또 멍청한 얼굴이 되었군... 아, 이참에 조의신에게 각인시켜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 뭘?"
왜 이렇게 쎄하지?
슬슬 더워지는 날씨 아닌가?
"신수. 조의신이 어딜 간다는 군. 그렇지만 내가 예상하기로는 100퍼센트 어딜 다쳐올 거다. 뭐라 잔소리 좀 해봐라. 내 말은 안 듣지만, 네 말이라면 들을 것이다."
-그르르르르...
"내 탓이 아니래도. 조의신이 언제 말하고 다쳐왔나?"
내가 지금 뭘 들은거지?
어안이 벙벙한 와중, 올무는 꼬리를 팍내리더니 날 책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반박이나 변명을 하기엔 쌓아온 업보가 너무 많은 나머지 뭐라 하기도 힘들었다.
"... 안 다쳐올게. 나 믿지? 응?"
-왕앙...
"응응, 다 황지호의 거짓부렁이니까."
-왕...?
"암, 그렇고말고."
"잘들 노는군."
황지호가 뭐라 틱틱한 것 같은데, 잘 못 들었다.
어쨌건 올무는 다시 꼬리를 붕붕 흔들더니 내게로 안겨들었고, 나는 올무를 받아 둥기둥기를 해주었다.
"후예들은 낮잠 중이니 이 음식들은 냉장고에 보관하도록 하지."
"그래."
황지호는 주방 쪽으로 걸어다가 멈칫하더니, 다시 이쪽으로 척척 걸어와서는 영약을 손에 쥐여줬다.
... 영약?
"내가 돌아올 때까지 먹어라. 신수. 감시를 부탁하지."
"... 뭐?"
"그럼 이만."
올려다보는 올무의 시선이 따갑다. 어떻게 이렇게 시선이 무겁고 날카로운지. 우리 올무는 카리스마가 넘치는구나.
"윽..."
꾸역꾸역 참고 먹으니, 또다시 기척없이 다가온 황지호가 입에 사탕을 물려주었다.
"... 큰 간섭은 하지 않겠다 했으니 막지는 않을거다. 그렇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 쯤은 해주도록 하면 안되겠나? 아니면 나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이런 것 뿐이다."
"굳이 필요는 없는데..."
"그런 말을 하고 저번 담에도 쓰러졌었지. 너는 표출을 잘 하지 않으니까 어느정도 일이 어려운지 가늠이 안 간단 말이다."
"..."
"자유를 억압하다가 너무 큰 미움을 받았다보니."
자택감금으로 한 몇 일 토라졌긴 했었다.
저렇게 말하니 나도 더 할 말이 없는데.
"거들 수 있는 선에서만 돕겠다. 인력 투입은 하지 않을테니, 조의신."
"... 하아, 진짜. 별 거 아닌데..."
"..."
올무가 좋다고 너무 쫄래쫄래 따라왔던 걸까?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가 될 줄은 몰랐는데. 애초에 이렇게 털어놓을 것도 아니기도 하고.
"... 저주에 걸린 것 같아."
-왕?
"뭐?"
"손에 뭐가 생겼는데..."
"손에?"
"그, 빨간실이 자꾸 눈에 보이는데."
"... 실이?"
"자꾸 추임새 넣지 말래?"
너무 부담스럽다.
질색하며 학을 떼자, 황지호가 머쓱한듯 킁,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 그 실이 혹시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보이나?"
"어? 아니. 너무 얇아져서 안 보이는데... 손으로 잡을 수가 없으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그런가..."
"뭔가 짐작가는 것 있어?"
"... 고딩한테 이런 걸 말하다니, 죄악감이 드는군."
"고딩이라니..."
"일단 아직 고등학생이지 않은가."
"뭐어,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고딩이 마냥 어린애는 아닌데 말이야.
특히 나같은 경우는 더더욱.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청실홍실(青线红线) 설화를 아나?"
"정혼점(定婚店)이랑 관련 있는거로 알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나 보지?"
"... 노래로 더 알아서."
그 말에 황지호는 피식 웃었다.
누런 호랑이가 최신 노래를 듣고 다니는 줄은 몰랐는데.
"이 설화는, 어떤 노인이 청실홍실로 인연을 맺어 주는 것을 보고, 한 총각이 하늘이 정해 준 자신의 배필을 알게 되었다. 로 시작하지."
"... 결국 그래서 그 배필을 죽여 거역하려 했으나, 결국은 그 배필과 결혼한다는 내용의 설화다."
별 거 아닌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황지호가 말을 이었다.
"중요한 점은, 원래는 남녀 인연이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남이나 여여로도. 무생물로도 이어진다. 관련된 물건으로는... 애나벨이 있겠군."
"... 인형이랑 이어진다고?"
"그래서 인형이랑 계속 만나고 결국 죽을 때까지 함께하잖나."
"... 그거 괜찮은건가."
나도 올무가 아닌 다른, 저런 저주받은 인형이랑 이어지면 어떻게 되는거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리고, 홍실의 주인은 청실을 알아볼 수 없다. 청실만 알아보지."
"이유는?"
"설화에서, 아내되는 여자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남자는 알아봤거든."
"그런가... 찾기 어렵겠네."
"의외로 범위는 한동네 안으로 제한되니 발견하기 쉬울거다."
"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만나겠지."
"... 그렇군. 만나고 있으니."
"그래, 만나고 있으... 뭐?"
내가 방금, 뭘 들은거지?
"내가 청실의 주인이다. 조의신."
황지호가 청실의 주인이라고? 말도 안된다. 아니, 그, 이게 이렇게 이어진다고?
"죄악감이 든다는게 이런 의미였어...?"
"신화계 호족과 인간의 나이차는 큰 법이니."
"아니, 아. 억."
뒷목이 뻐근하다. 충격으로 인한 실신이라도 하고 싶은데, 건강한 플레이어의 육체는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크르르르르륵...
자꾸 냄비에서 끓어 넘치는 소리가 나는데. 아닌가? 깊은 울림을 봐서는 하수관으로 대량의 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아... 그저그런 기시감으로만 알았는데. 설마 네가 내 짝이 되다니."
"... 이거 못 끊지?"
새끼 손가락을 물고 있는 걸 보고 올무도 내 손을 물려고 했지만, 차마 물어뜯을 수는 없었는지 안절부절하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 그렇게 해도 안 끊긴다."
"... 허어."
"... 잘하도록 할테니 손가락 물어뜯는 건 그만두면 안되겠나?"
"벌써부터 결혼한 것 같은 말투는 그만둘래?"
어쩌다가 내가 이런 호랑이랑?
생각해보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다. 물론 그랬다면 죽을만큼 행복하긴 했을테지만...
"그, 러면... 이걸 이제 남들한테 어떻게 말하고 다니지?"
"방금 다 알았다."
"뭐?"
"내가 문자를 보냈다."
내꺼니 침 바르지 말라고 말이야.
황지호의 뒷말은 대충 넘기고 디바이스를 뺏어보니,
-배필을 찾았.
-예?
-... 그게 무슨 소리지?
-뭐라고요? 사실입니까? 누굽니까?
-조의신.
-?
-?
-?
-뭐?
-황호? 대답 좀 해봐
-야, 임마 자세히 좀 말하라니까?
-... 적호, 너무 당황했군. 진정해라.
-아니 의신군이라니까? 진정을 어떻게 하냐고 우리 의신군 불쌍해서 어쩌지
-전화 받아요, 황호님.
-야:: 받아 시발 집 날라간ㄷ
-은호, 진정해라.
-ㅈ딥 날ㄹ거ㅏㄴㄷㄱ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보다 호족 전용 챗방이 있는 것도 놀라웠다. 다들 개인톡 쓸 것 같은데. 백호군이 제일 의외다.
"통화는 받지마라."
"왜?"
"곧 올거다."
디바이스 화면에 무수한 통화의 요청이 올라오더니,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이윽고 집 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
콰앙-!
"... 진짜 집이 날라갔네."
"상관없다. 혼수부터 정하지 않겠나?"
"..."
"아, 이런."
갑자기 황호가 이능을 끌어올리더니, 집 전체에 보호막을 걸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붉은 번개와 무언가의 충돌소리.
"... 적호?"
"의신구운!!!"
"얌전히 걸어왔으면 좋으련만, 방해자가 왜 이렇게 많은지."
"조의신, 괜찮나? 황호는 어디있지? 괜찮다면 베어버리겠다."
"... 백호군까지? 아니, 그보다 황지호를 벤다는 소리야?"
이렇게까지 몰려올 일인가, 싶을 때였다.
"의신이 형!!! 어딨어요 형!"
집을 날린 은호가 왔다. 아니, 성헌이가.
얼마만에 형이라고 불려보는지 모르겠다. 아직 형이라고 생각해주니 다행인데.
"최종보스의 등장이군."
"성헌아?"
"형, 황호랑 결혼하지 마요! 차라리 저랑 해요! 제가 많이 모자라고, 또 부족하지만 차라리 저 황호보다는 나아요!"
"거 너무한 말이로다."
황지호는 성헌이의 말을 일갈해버리고는 내 손을 잡았다.
옆에서 본 황지호의 모습은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태양같았다.
따뜻하고, 정열의 뜨거움과 밝으며 이로운.
'...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남편감으로는 몰라도, 친구감으론 괜찮으니 굳이 연연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해탈한 감도 없잖아 있고.
"그냥 한 대 맞고 진정시키는건 어때?"
"그건 좀... 아플 것 같아서 싫다. 하하!"
유쾌한 웃음에 나도 따라 킥킥 웃었다.
올무는 이를 드러내며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어쩌겠나.
나도 올무랑 인연이 아니어서 아쉬운데.
"우리 올무 황지호 물고 싶어?"
"그래서 안된다는거다. 한 대씩 맞다가는 다함께 날 치러 올텐데."
-왕왕!
"분명 세게 물어서 보호막을 약하게 만든 뒤 다같이 날 칠 셈이겠지."
"잘 알면 좀 열어!"
이제 성헌이가 눈에 보이는 근처까지 다가왔다.
꼭 잡은 두손을 보니, 화를 더 내며 모든 걸 찢어발길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근데 이거 실, 보여?"
"아니. 그러나 느낌은 있다."
그렇게 말하며 황지호는 내 손을 들어올려 입맞춤 했다.
...어쩐지 내 눈에도 청실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였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