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월 뒤에 찾아온 새벽
플로우 미엘르
조의신x권레나
익숙한 갈증이 또 다시 신체를 범람한다.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고, 시야가 흐려지며 목은 타들어간다.
이젠 두 다리 조차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하며 자조했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것은 아니었다.
이 상태는 위험하다.
누구보다도 조의신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 조의신은 그토록 미루던 결정의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어서 빨리 갈증을 해소하거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홀로 죽거나.
누군가를 죽이거나, 나의 목숨을 포기하거나.
태초부터 그래왔었다. 저주받은 그의 종족은 타인의 목숨에 기생하며 질긴 생명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제 그토록 작을지언정 끊임 없이 타오르던 불꽃 조차 꺼질 순간이 온 것이다.
조의신은 마침내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온 몸에서 힘을 뺐다. 시체와 다름없는 창백한 몸뚱아리가 끝내 바닥을 향해 무너지고, 서서히 그의 눈이 감긴다.
그리고는... 암전이다.
.
.
"⋯요!!"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순식간에 시야가 돌아왔다.
"!!!"
"아, 저⋯ 괜찮으신가요? 쓰러져 계시길래..."
"네, 네...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권레나였다.
전생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니 전생의 기억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굳이 아는 척 하지 말고 적당히 헤어지는 게 좋겠지. 그냥 가면 걱정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도록 뭐라도...
"저⋯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권레나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내 몰골이 꽤나 심각한 모양이었다.
"네. 정말 괜찮아요. 걱정 감사합니다."
땅바닥에서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꼴이 별로일 테니 우선 일어섰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까지...?"
여기는 길에서 벗어난지 꽤 되는 곳이었다. 일반적인 산책코스인 등산로를 걸었다면 절대로 올 수 없었을 텐데...
"아, 그게 길을 벗어나 걸으면 예쁜 풍경이 펼쳐진다고 들었어요. 혹시 악상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길에서 벗어났는데..."
아무래도 길을 잃었나 봐요. 권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길까지 안내해 주고 병원에 가는 척 헤어지면 될 것이다.
"아, 그러면 길까지 같이 갈까요?"
"아, 정말요? 그럼 같이 가요."
길까지 가면서 바이올린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숨어 지내느라 바깥 소식은 거의 접하지 못했지만 권레나가 유명한 인물이 되었단 것은 알 수 있었다.
옷을 구하고 사람도 아닌 것들의 피로 생을 연명하면서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을 정말 많이 들었으니까.
"앗...!"
권레나가 나뭇가지에 스친 손가락을 부여잡았다.
"괜찮아?"
대화 도중 환생 후의 우리 또한 동갑인 걸 알게 되어 말을 놓기로 했다.
"응, 약간 스친 정도 같아..."
순간 혈향이 스친다.
"⋯피 나는거 아니야?"
갑작스레 갈증이 도진다.
"플레이어니까 이 정도는 금방 아물, 의신아?"
나는 옅은 생채기를 입은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왔다.
"아, 잠깐만 의신아! 사람 손에는 의외로 세균이 많다고 하니까 소독약이...!"
내가 상처를 핥자 순식간에 상처는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
"어? 나았네... 의신이 네 능력이야?"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래도 함부로 핥으면 안 돼. 사람 손에는 수많은 세균이 산다고 하니까ㅡ"
만난지 얼마 안 되어서 무례를 저지른 내게 이리 상냥하게 대해주다니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음, 의신아?"
그대로 손목을 깨무니 소리 없이 송곳니가 박혀들어갔다.
"?!!?!"
권레나가 놀라서 나를 밀어낸다.
"쓰읍..."
피를 섭취하니 약간의 이성이 돌아온다.
"의신아, 방금. 뭘 한거야?"
손목을 붙잡고 경계하며 내게서 물러선다.
"⋯미안해, 레나야. 사실 난 뱀파이어거든. 몇 년 동안 굶어서..."
"⋯뭐? 몇 년?!"
내가 뱀파이어이고 자신을 물었다는 것보다도 몇 년간 굶은 것에 더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 이 이상 피가 흐르면 권레나의 옷에 피가 스며들 것 같았기에 손목에서 재빨리 상처를 없애주었다.
"⋯피, 를 마시려고 하는 건 본능인 거야?"
"어. 피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그렇구나..."
환생한 권레나도 전생과 그리 다르지는 않은가보다. 그동안 힘들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갑자기 놀라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멀어지려는 나를 권레나가 붙잡았다.
"의신아, 잠깐만...! 몇 년 동안이나 굶었다면서! 그... 인간의 음식을 먹어도 되려나...?"
"인간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진화하긴 했지만 공복을 채우려면 피가 필요해."
"아..."
만난지 얼마 안 된 나를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것 같다. 정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너무 착했다.
"그럼... 수혈 팩 같은게 있으면 되려나?"
"수혈 팩은 인간들이 몸에 피가 부족할 때를 대비해 만든 거잖아. 뱀파이어들은 그런 생명유지 장치를 빼앗지는 않아."
'본능에 따라 직접 생명을 갈취하는 게 더 취향이기 때문이지만.'
"⋯어? 그러면 어떻게 종족이 유지되는 거야...?"
"계약을 맺으면 돼."
"계약?"
"어. 뱀파이어가 인간과 계약을 맺어서 인간은 일정기간동안 뱀파이어에게 피를 상납하고 뱀파이어는 그 대가로 자잘하게 도움을 줘."
"그렇구나..."
권레나는 내 설명을 듣고는 생각에 잠긴 것 같다.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이상하네. 아무리 피를 섭취했다지만 몇 년이나 굶었으니 갈증이 해소될 리가 없을텐데.'
예전에 뱀파이어들이 지니던 서적을 몰래 살펴본 적이 있다.
그때 서적에 따르면 특정 인간들은 특별한 피를 가지고 있는데 이 피는 아주 극소량만을 섭취해도 갈증이 해소되기 때문에 모든 뱀파이어가 탐을 내지만 찾기 매우 힘들다⋯ 고 했었지.
'권레나가 그 경우인가?'
그 특별한 피를 레어 블러드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왜 희귀혈이라고 부르지 않고...'
"의신아."
"듣고 있어, 레나야."
생각을 끝낸 건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랑... 계약할래?"
"⋯뭐?"
'나랑은 처음 만났을 텐데... 어째서?'
당황해서 얼굴에 감정을 드러낸 것인지 권레나가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너를 믿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실제로도 내가 밀어내니까 금방 물러나줬고..."
"......"
"그리고 계약을 하면 피를 대가로 자잘한 도움을 준다고 했었지...?"
'하지만 계약은 권레나를 아프게 할 수도 있어. 이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는데⋯'
"의신아."
"응?"
나는 고뇌하던 것을 멈추고 권레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이다.
유난히 동그랗게 보이는 눈동자가 잔잔하지만 짙게 타오르고 있었다.
"방금, 내 피를 마신 대가로 청할게. 나랑 계약하자."
'아, 이 결심은 꺾을 수 없을 것 같네.'
나는 결국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계약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계약방법은 간단하지만 아픈 방식이었다.
우선 신체 부위 중 하나를 택하고 상처를 내어 피가 나오도록 한 뒤에 뱀파이어의 능력으로 피를 굳혀 각자를 상징하는 모형을 계약상대의 상처 부위에 고정시키면 계약성립이었다.
어찌 되었건 뱀파이어는 괴물이라는 인식이 있으므로 최대한 겉으로 드러나기 힘든 부위를 택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그러려면...
"꼭 겉으로 드러나기 힘들어야 하는 거야?"
"지금 세상은 뱀파이어가 계약한 게 알려져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우리 집에 가자. 권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이끌었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그냥 얌전히 끌려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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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레나의 집에서 계약을 마친 뒤 면접을 보기로 했다.
면접관은 권제인과 재러드 리로 자신들이 부재중일 때를 대비한 권레나의 호위를 뽑는 면접이라고 한다.
권레나는 안 그래도 바쁘신 분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다고 하며 내게 면접을 통과해 호위가 되어주기를 부탁했다.
피를 동의 없이 섭취하였으니 당연히 받아들였다.
내가 세계를 구한 뒤 모두가 전생과 똑같이. 하지만 조금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나게 된 이곳에도 광림과 스킬이 존재했다.
내 경우 광림은 그 능력 자체가 조금 달라졌지만 스킬은 전생에 올려놓은 레벨 그대로 넘어왔다.
순조롭게 면접을 통과한 나는 일정 기간 동안 권제인, 혹은 재러드 리의 감시 아래 호위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권레나는 미안해하는 듯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할 일은 변하지 않은 듯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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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제인과 재러드 리의 감시 아래 나는 면접을 완전히 통과했다. 이제 감시 없이도 호위를 수행해야한다.
물론, 감시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나는 권레나를 지킬 것이다. 전생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며 이번생의 생명의 은인이고 계약자이니까.
파티 등에 나설 때에는 내가 파트너가 되기로 했다.
전생에 익힌 파티 지식이 있긴 하지만 혹시 몰라 한번 더 자세하게 공부하였다. 호위 겸 파트너로서의 파티는 조금 다르게 행동해야하는 것 같다.
춤을 출 필요는 없었지만 잠시 연주를 할 예정인 권레나의 근처에 머물러야 했다. 여러 사항들을 숙지한 후에 파티복장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이동했다.
이곳에서의 나와 권레나는 모두 성인이었으므로 술을 먹는 것이 가능하지만 권레나는 술은 먹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꿈 없는 깊은 잠을 나고 일어나니 몸이 상쾌한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빨리 디바이스의 전원을 켜 시간을 알아보니 오전 8시. 호위로서 실격이다!
재빠르게 일어나 준비하고는 그나마 몸에 맞는 평상복을 걸치고 나왔다. 어제보다 조금 키가 큰 것 같지만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급하게 문을 여니 계단 쪽에 있던 세 명이 나를 돌아보았다. 깔끔한 복장의 권제인, 원피스 차림의 권레나, 정장 차림의 재러드 리. 그들은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손짓을 했다.
다가가니 확실히 권레나보다 작았던 어제와 달리 조금 큰 것 같기도 했다. 권제인과 재러드 리도 나를 보며 조금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얘기를 들은 것인지 권레나는 놀란 기색도 없이 말갛게 웃으며 지금부터 외식을 하러 갈 것이라고 했다.
내가 뱀파이어라 인간의 음식으로 공복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권제인과 재러드 리가 권유해주어서 우선 따라가기로 하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권레나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모습이 어려졌을 뿐이지 정신은 그대로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따라가다보니 한 식당이 나왔다. 그들은 그 중 가장 커다란 룸을 빌렸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빌린 것이지만 권제인의 사인이 들어간 CD로 거래했다고 한다.
⋯권제인의 사인이 들어간 CD라면 집을 내놓아서라도 사겠다는 이들이 있을텐데 그것을 고작 식당 룸을 빌리는 것에 쓰는 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본인이 그런 것이니 말로 하지는 않았다.
식당으로 향하면서 권제인과 재러드 리는 내 옷에 관한 얘기를 했는데,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큰다면 새로 옷을 사는 건 낭비이니 사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권레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해서 말하지는 못했다.
룸에 들어서고 문을 닫은 뒤, 나는 물이 담긴 병과 잔에 손을 뻗었지만 재러드 리에게 저지당하였다. 그래서 수저통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또 다시 저지당하고 말았다.
재러드 리에게 물과 수저를 준비해야한다는 강박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잠시 생각했지만 그럴 리는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냥 권제인의 물과 수저를 직접 준비하고 싶었다는 뜻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음식을 주문한 후 그 아이템의 입수 경로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우선은 뱀파이어에게 얻었다고 말한 뒤 열심히 생각했다. 작아진 몸으로 호위 일을 하는 것은 힘들테니 권레나에게 부탁해 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지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입 안에 억지로 욱여넣은 음식물을 물로 넘긴 뒤 체내의 피를 이용해 에너지를 흡수했다. 한번 더 물로 입을 헹구며 호위 일에 관해 말하려는 순간.
ー삐이이이익!
플레이어SAT-K의 위성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긴급!!! 큰일이에요!! SR+++급 이계래요!!!]
SR+++급. 꽤 높은 등급의 이계였지만 이곳에 있는 인원과 몰래 호위하던 영원의 호수 일원이 함께 한다면 공략을 하는 것쯤은 가능할 것이다.
'에너미가 이계 밖에 생성되기 전에 빨리 들어가야해⋯!'
전생의 아이템창이 그대로 넘어왔기에 난 무기가 많았다. 그 중 활용이 편한 총과 칼, 마법 롯드를 손에 쥐고 권레나와 권제인, 재러드 리를 둘러보니 전투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권레나는 전투하기엔 복장이 조금 불편해보였지만 권레나도 훌륭한 플레이어이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였으니 멋지게 활약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룸의 문을 여니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탈출구는 사방에 있으니 그들이 달려온 쪽으로 가면 이계가 있을 것이다. 시선을 교환한 우리는 그대로 벽을 박차며(권레나는 내가 도와주었다) 이계를 향해 달렸다.
우리 시야에서 숨어서 호위를 하던 영원의 호수팀 일원 둘이 함께 해주기로 하였다. 다 같이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이계 안으로 뛰어들었다. 영원의 호수팀 중 몇이 이곳에 남아 이계 밖에 생성되는 에너미를 처리할 것이라고 하니 한시름 놓았다.
[다들 도망가아아아아아악!]
식당 내 분실물과 미아를 위한 방송에다가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아까도 그랬지만 식당이다보니 침착한 방송을 기대하기는 힘든 것 같다.
이계에 들어서니 함정 비중이 높은 던전이었다. 함정 해제 스킬이 있는 권레나를 중심으로 작전을 짜 효율을 높여야 한다.
"이곳은 함정 비중이 높은 것 같네. 부탁할게, 레나야."
권제인 정도 되는 실력이라면 함정이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위험요소는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좋겠지. 권레나의 함정 해제 스킬로 함정들을 하나하나 해제하면서 가다 에너미와 조우했다.
에너미는 권제인의 바이올린 연주 앞에서 아련하게 스러져갔다. 연주에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먼지가 되어 가는 광경은 묘했다.
그 후 우리는 순조롭게 이계를 공략해나갔지만 에너미의 공격을 피하는 과정에서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권제인과 영원의 호수 일원 한 명, 재러드 리와 영원의 호수 일원 한 명, 권레나와 나.
영원의 호수 팀은 강하니 걱정하는 것이 도리어 실례라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쌓아온 실력이 있어 권레나와 함께 에너미를 공격하긴 했지만 다른 에너미가 채찍술을 펼치는 권레나에게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권레나를 끌어안고 피한 것은 좋았지만 그 순간 함정이 발동되어 좁은 공간에 갇히고 말았다. 권레나가 당황하고 있는데다 아직 에너미의 처치도 덜 끝났으니 빨리 나가는 것이 좋지만 이건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었다.
'이 틈에 피를 섭취한다면⋯'
불가능 하지는 않았다. 이 틈에 피를 섭취해 몸을 키우고 익숙한 몸으로 전투를 펼치는 것이 좋았다. 지금까지 만난 에너미들은 체내에 피가 존재하지 않는 에너미들이었지만 이번에 새로 나온 에너미는 마수종이었다.
짐승의 형태를 띈 그 에너미라면 분명 체내에 피가 있겠지. 그 녀석에게 생채기라도 낼 수 있다면 게임 끝이었다. 동맥일수록 좋지만 모세혈관이라도 심장의 피를 굳히는 것에 도움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아주 조금의 피라도 공기와 만난 순간 내가 조종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자기자신의 피와 타생물체의 공기와 접촉한 피를 조종할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해.
"의신아⋯?"
"응?"
아차, 권레나는 뱀파이어가 아니라서 어두운 지금 시야확보가 되지 않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시야가 확보되어봤자 이곳이 좁다는 것과 함정이라는 것 외에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음⋯ 의신아, 혹시 앞 보여⋯?"
역시, 불빛이 있는 곳에 있다가 어두워지니 눈 앞이 깜깜한 모양이다. 나는 권레나의 흐트러진 머릿결을 정리해주며 답했다.
"응. 난 뱀파이어라서 어두울 때가 더 잘 보여."
"아, 그렇구나."
권레나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레나야,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지만 피 좀 줄 수 있을까?"
"어, 어? 피?"
"어. 어제의 사건도 있고 그래서 피를 섭취할 필요가 있거든."
"아, 알았어. 그런데⋯ 피를 어떻게⋯ 주면 될까?"
잠시 팔을 허우적거라던 권레나는 이 장소가 좁은 곳임을 깨달았는지 천장도 만져보고 하다가 내 팔을 만졌다. 내 팔에 얹어진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그냥, 소매만 조금 걷으면 돼."
그러자 권레나는 잡히지 않은 손을 이용하여 잡힌 손 쪽 소매를 걷었다. 그 손목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 툭 깨물었다.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물리니 놀란 건지 권레나가 잠시 움찔했지만 개의치않고 피를 그대로 마셨다. 한모금, 두모금, 세모금, 네모금. 그리고 한번 더.
뱀파이어는 특별한 피를 하루에 다섯모금 이상 섭취하면 위험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다섯모금까지만 마셨다. 벌써부터 정신이 아찔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권레나의 손목을 핥아 상처를 없앤다. 기분이 상기되어간다. 더, 더 마시고 싶어.
'더 없나.'
그 생각이 든 순간 정말 위험한 짓을 저질렀다는 자각이 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 상태로 육체를 재구성해서 에너미를 바로 처치해야했다.
"그럼, 부술테니까 조심해줘 레나야."
경고를 남긴 뒤 권레나의 머리를 감싸며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팔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쿵!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돌벽이 부숴져내린다.
"의신아!"
권레나가 내 팔을 살피려 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척 하며 그대로 돌멩이가 된 잔해를 집어 에너미에게 던졌다. 돌멩이 따위로 아플 에너미는 아니었지만 힘을 강화한 뱀파이어가 던진 만큼 따끔하기는 할 것이다.
'역시, 레나의 피가 좋긴 좋네.'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권레나에게 채찍을 들고 에너미가 주변에 못 오게 버티기만 하라고 한 뒤 마수종 에너미에게 달려갔다. 권레나가 나를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위험한 에너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있다고 해도 권레나가 알릴 것이다.
검을 들고 딱 한 번 에너미를 그어냈다. 이까짓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에너미가 발을 구르며 내게 돌진하려한다. 난 웃으면서 공기와 접촉한 에너미의 피를 움직였다.
심장부근에서 굳어라.
에너미가 이상을 느낀 것인지 정지했다. 그 순간 나는 재빨리 이능총을 들어 에너미의 머리를 박살내고 권레나를 돌아보았다. 권레나는 버티기는 커녕 오히려 맞서싸우고 있었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대단했다. 훌륭하게 전투를 할 수 있는 이에게 버티라고 한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사죄하며 권레나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현재 주변에 에너미는 없다.
하지만 채찍술로 저 등급의 에너미를 신속하게 처리하기는 힘들 것 같아 전투에 참여해 에너미를 리타이어 시켰다. 아까와 달리 권레나보다 커진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권레나와 나는 서로 부상은 없는지 확인한 후 일행과의 합류를 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목걸이로 연결된 몽마의 기운을 쫓으면서 공략을 진행했다.
간간히 권레나에게로 향하는 공격을 저지하다가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만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의신아, 우리 같은 곳을 빙빙 돌았었네."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내가 부쉈던 벽의 잔해가 보였다. 함정이 바뀌고, 에너미가 나와서 몰랐지만 저 잔해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조종했던 피만큼은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피를 다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권제인님과 재러드 리 씨도 비슷할지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떻게 하지?"
말은 질문의 형태로 끝났지만 권레나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은 플레이어SAT-K가 이계가 열리는 전조현상을 감지하지 못한 것, 아직도 일행을 만나지 못한 것이 있다.
'전자는 전생에서도 그랬었으니 지금 당장 생각할 문제는 아니고, 후자가 문제야.'
팔불출인 권제인과 영원의 호수 팀은 권레나와 떨어진 것을 알자마자 노발대발하며 벽이라도 깨부수면서 권레나를 찾아와야했다. 하지만 벽은 커녕 함정을 부수는 소리조차 없었다.
바이올리니스트답게 나보다 귀가 민감할 권레나도 그런 언급은 하지 않았으니 이곳에서 제대로 공략을 수행하는 것은 우리 뿐이겠지. 힘을 아껴두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피를 쓰면 더 효과적이지만 에너미의 피가 있는데 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작은 박쥐를 만들어 이능파를 불어넣은 뒤 주변을 둘러보게 시켰다. 피를 실처럼 가늘게 풀어 길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확인해본다.
갑자기 실이 끊겼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길이 열리고 닫히게 되는 것이겠지. 이 사실을 권레나에게 알린 뒤 박쥐에게서 정보를 얻으려는 순간이었다.
"의신아."
"왜, 레나야?"
"권제인 선생님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바이올린? 나한테는 들리지 않는다. 권레나의 청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뜻인가. 박쥐에게서 재러드 리의 위치를 얻어냈다. 재러드 리라면 푸른 눈의 바이올리니스트 옆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겠지.
그 방향으로 가면 된다.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데?"
하지만 확인은 해두어야했다. 혹시 모르니까.
"점점 커지고 있어. 저쪽으로 가자."
권레나가 함정 해제 스킬을 발동하며 나아가는 것을 쫓아갔다. 그러던 도중 에너미와 마주치고 말았다. 노랫소리로 사람을 유혹한다는 세이렌.
새와 인간이 합쳐진 모습이나 물고기와 인간이 합쳐진 모습이 아닌, 조류와 어류가 섞인 듯한 기묘한 형태의 현혹계 마수종이었다.
'세이렌 맞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알고 있던 세이렌과는 달랐다. 그 에너미가 천천히 입을 열어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막아야해!'
지금 저 에너미를 막을 정도의 피는 없었다. 내 몸에라도 상처를ー
"의신아, 너무 혼자 애쓰지 않아도 돼."
권레나가 부드럽게 말하며 백금색의 바이올린을 부드럽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부드럽지만 선명한 선율이 울려퍼진다.
세이렌이 입을 다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노래를 시작한 것 같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노래에 현혹되어 제 목숨을 그대로 내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ー허상연회!'
순간 아주 아름다운 숲의 광경이 펼쳐졌다. 나와 권레나가 처음 만났던 그 장소. 권레나의 호위가 되기로 한 후 권레나의 악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알려준 장소였다.
새의 지저귐이, 나비의 날갯짓이, 내리쬐는 햇살이 투명한 옹달샘이라기엔 크고, 호수라기엔 작은 물 웅덩이 위에서 부숴지는 광경이. 향긋한 풀내음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재현이 되었다.
'광림으로 이루어진 환상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는걸⋯'
전생에서는 정신력의 문제로 전투 도중 허상연회를 쓰는 것을 미뤘었다. 하지만 훌륭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그것을 해내었다!!!
구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입을 뻥긋거리던 에너미는 전투의지를 상실한 것인지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권레나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에너미가 계속 되는 환상을 알아채고는 몸부림을 쳤다.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깨닫고 발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그 입에 이능파를 넣으면 터지는 폭탄을 던졌다.
펑!
큰소리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고 곡을 완주한 권레나가 눈을 뜨기 전 피들을 이용해 사체를 볼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권레나가 눈을 뜨고 에너미의 사체를 확인함과 동시에 권제인과 재러드 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일행과 만났으니 이제 보스만 공략하면 된다.
걱정의 말을 쏟아내는 둘을 보다가 쎄한 것을 느꼈다.
'영원의 호수 일원인 둘은 어디 간 거지.'
권레나도 알아챈 이상이었다.
"그런데, 다른 두 분은 어디 계세요? 같이 떨어지셨잖아요."
권제인과 재러드 리의 표정이 굳은 순간 권레나가 내 쪽으로 발을 박찼다.
탓! 쿵!
모래바람이 사그라들기도 전 나는 권레나를 안고 뛰었다.
'레나가 들은 바이올린 소리는 진짜야. 진짜가 아닐 수 없어. 당연히 권제인도 레나의 바이올린 연주를 알아들었겠지. 하지만 저 둘은 에너미⋯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중간에 길이 꼬인 거야!'
급한데로 현혹계 마수형 에너미, 가칭 '세이렌'의 피를 이용해 벽을 공격했다. 벽에 뚫린 작은 틈을 계속해서 뚫고 그 사이로 몸을 던져넣었다.
'아까 박쥐와 실을 통해 확인한대로라면, 내 계산이 맞다면 넷은 지금 여기 있어야해!'
"레나야!!"
"조의신?"
그 목소리에 '진짜'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권레나를 부축하며 일어났다. 권레나는 권제인의 바이올린을, 나는 박쥐를 통해 재러드 리를 확인했다.
이 둘은 진짜겠지.
"도플갱어가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있던 일을 전하려는 찰나, 내 실수가 생각났다. 분명, 재러드 리는 푸른 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옆을 지키기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권제인의 곁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박쥐에게서 얻은 정보의 재러드 리는 누구랑 같이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쥐새끼 한마리가 있었다.
바로 내 모습을 하고 있는 도플갱어였다. 이미 하나는 죽어있는 것을 보아 권레나의 바이올린 소리 덕에 알아챈 것이겠지. 도플갱어는 변하고 싶은 대상의 정보를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서 억양과 말하는 속도까지 흉내낼 수 있다.
저 도플갱어는 나를 싫어하는 뱀파이어의 하수인이었다. 옷 안 쪽에, 피로 이루어진 뱃지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해야했다. 하지만, 난 권레나의 피를 마셔 모습까지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해야할까.
권제인과 재러드 리, 영원의 호수 팀 일원은 나와 도플갱어를 경계하며 권레나를 감쌌다. 권레나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 확실해져야한다.
그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뱀파이어의 하수인인 그는 같은 뱀파이어 종족인 내게 꿇을 수 밖에 없을테니.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내가 뱀파이어인 것을 밝혀야했다.
그러니,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이 도플갱어 녀석을 제압해."
그러자 던전 안에 있던 몽마가 있는 힘껏 달리는 속도로 끌려오더니 도플갱어에게 수면가루를 뿌려 제압했다. 안개나무를 조련하지 못한 이계 속 몽마들은 다 저런 건가.
마족을 일정 기간동안 지배하는 것. 이것에 관해 전에 권제인과 재러드 리에게 말했었다. 식당에서도 대화했으니 영원의 호수 일원 둘도 알겠지.
그리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이 방법이 통한 것 같다.
.
.
우리 여섯은 보스룸에 도착했다. 이곳의 보스는 꽤 강했다. 계속해서 독을 방출하는 에너미로 뱀파이어인 나는 괜찮지만 인간인 다섯에게는 조금 힘들 것이다.
지난번 안개에서의 사태 때문에 아예 손수건끼리 이어서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권레나가 독에 당할 확률은 조금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가스형 독이기 때문에 중독되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해.'
하지만 잘 버티던 일원 둘이 비틀거렸다. 그리고 직후 바로 에너미의 공격에 얻어맞고는 벽으로 날아갔다.
"커헉!"
"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스러진 그들을 한번 더 공격하려 하는 것을 권제인과 재러드 리가 막아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쿠구구궁!!
굉음과 함께 모래먼지가 휘날렸다. 권레나를 감싸 보스 에너미의 시야를 빗겨난 구석에서 그곳을 살핀다.
'재러드 리가 있으니 권제인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하지만 부상을 입은 둘은 괜찮을까.'
권레나가 내 소매를 세게 부여잡고 숨을 고른다. 점점 독이 퍼지는 중인 것 같다.
'해독 아이템의 등급이 낮아서 소용 없을텐데!'
결국 난 최후의 수를 쓰기로 했다.
'첫번째.'
진명의 봉인을 없앨 것.
심장쪽에 있던 흡혈박쥐의 상징을 부쉈다.
"커헉!"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의⋯신, 아!"
흐려질 것만 같은 권레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걱정마, 레나야. 일시적인 거야. 난 뱀파이어니까 걱정하지마."
'두번째.'
내 피로 진을 그릴 것.
피 섞인 기침을 하며 내가 토한 피로 바닥에 진을 새겼다. 흡혈박쥐와 왕홀의 문양이 새겨진 진이었다.
"쿨럭!"
한번 더 대량으로 피를 토한 뒤 마지막 세번째를 이행했다.
이능파를 불어넣을 것.
권레나의 흐릿한 비명같은 외침이 언뜻 들린 것도 같았다. 시뻘건 피 색이었던 진이 내 이능파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밤하늘처럼 진하고 고요하게 빛난 그것 위에 어떤 존재가 나타났다.
"이런, 아가야. 계약을 깰 정도로 급한 일 같지는 않구나."
뱀파이어 간의 계약은 몹시도 중요했다. 그랬기에 서로 계약을 하는 뱀파이어들은 거의 없었고 만일 하더라도 진명을 걸어 그 근원을 제 스스로 봉인해버리는 짓을 해야했다.
난 지금 뱀파이어의 수장이 필요했다.
"내 피는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특별하지."
뱀파이어 수장의 피를 정제하고, 이능파를 섞으면 치료제가 된다. 뱀파이어 수장의 피는 정말 특별해서 공기중에 그 피가 기체처럼 퍼져나간다.
과거, 뱀파이어 수장은 홀로 존재했었다. 홀로 다른 이들과도 유별나게 차이나는 형질의 종족이었던 그는 아무도 그를 차별하지 않았음에도 외로웠다. 피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위대한 뱀파이어는 자신과 같은 종족이 없다는 것에 외로움을 느꼈다.
끝내 그는 팔을 그어냈다. 그의 팔에서 흐른 피가 뚝 뚝 떨어졌다. 금방 아문 모습에 그는 허탈했다. 날카롭게 갈았던 손톱을 다시 뭉툭하게 갈았다.
한숨을 쉬며 일어난 그는 이상을 감지했다. 붉은 빛을 띈 공기가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 핏방울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 후 기체가 된 그의 피를 들이마신 박쥐는 흡혈박쥐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박쥐는 종종 뱀파이어 수장의 피를 인간들에게 옮겼다. 뱀파이어가 된 순간 기억을 잃어버리고 새로 태어나게 된 그들이 인간으로 살았던 기록은 없었다.
종족 자체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진족이나 후예에게는 안 통했지만 인간이나 동물에게는 통했던 것이겠지.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종족이 된 그들을 보살폈다. 하지만 진족들 사이에선 배척받았다. 그래서 그는 진족의 수장들과 계약을 했다. 그 계약의 내용은 오직 수장들만이 알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뱀파이어 수장은 향록에게 자신의 피를 넘기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 자신의 피가 치료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적인 치료제는 아니었고 오직 해독작용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해독기능은 특히 기체로 변하는 특성 덕에 독안개, 혹은 독가스에 효과가 좋았다. 의식이 없는 이 또한 호흡은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그가 지금 조의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는 제 피로 이루어진 소중한 동족의 후예의 부탁을 저버릴 리가 없다.
'원래는 목숨이 위태로울 때 부르려고 했지만.'
아니,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맞다. 내 목숨은 아니지만 권레나의 목숨이 위험하니까. 권제인과 재러드 리, 영원의 호수 일원 둘까지도.
"아가야, 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이야기 하자꾸나."
뱀파이어의 수장은 순식간에 피를 정제하고 이능파를 흘려넣었다. 뱀파이어 수장 특유의 피 같은 검붉은 색이 오히려 피보다 더 피 같은 것은 왜 일까.
"⋯의야. 충고를 하나 해주마."
독 때문에 서있기도 벅차하는 권레나를 조심히 안아 들며 조의신은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청월(靑月)이 뜬단다. 바로 지금이지."
이계에 들어온지 고작 몇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달이라니. 시간축이 어긋난 모양이다.
"의야. 너라면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 믿는다."
뱀파이어 수장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갔다. 진에 들어간 피와 이능파의 양이 모자란 탓이었다.
'청월이라⋯'
뱀파이어들에게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지만 뱀파이어라면 다 알고 있는 전설.
청월이 뜬 직후, 새벽이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흡혈귀들은 새 삶을 얻게 된다.
내 이름 조의신에는 새벽 신 자가 들어간다. 내 광림도 새벽과 관련이 있었다. 뱀파이어들에게 불길하다는 얘기를 듣는 이유.
'내 광림을 써야할 때구나.'
내 광림, '새벽서월(曙月)' 달이 떠 있는 새벽을 부른다. 새벽녘의 달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는 이상 새벽 아래에서 날 이길 수 있는 건 다른 진족들이나 후예 정도.
적어도, 뱀파이어나 에너미 따위로 당하지는 않는다.
점점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뱀파이어 수장의 해독제가 듣기 시작한 것이겠지. 채찍을 이용해 천장을 부쉈다. 새벽의 달, 서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독을 뿜어내던 이 에너미는 달빛을 받자 움추러들었다. 꼴에 식물이라고. 그대로 채찍을 휘두르면서 캐스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전에 더 빨리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식물형 에너미에게 공격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원의 호수 팀 답게 빠른 회복이다. 권레나도 상태가 괜찮아진 건지 날 붙잡고 있다.
이제, 에너미를 끝장낼 시간이다.
.
.
"지금, 다른 아이들은 자고 있단다. 이제서야 널 제대로 의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구나."
뱀파이어에게 새벽은 불길하다. 새벽에 가장 약해지는 그들은 새벽을 불러오는 날 꺼렸고 자연스럽게 수장처럼 내게 호의를 가진 뱀파이어들마저 새벽 신을 떼고 옳을 의 자만을 불렀다.
"아가야, 네 생각은 이미 알고 있었단다."
뱀파이어 수장의 부드러운 말과 함께 조의신이 세웠던 제 몸을 갈아넣은 계획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의신의 잘못을 들추는 것으로 정신 공격을 퍼묻던 뱀파이어는 그런 일쯤은 진족들이 뭉쳐 해결하면 된다고 하고는 수장들과 연락하겠다며 떠나버렸다.
자기 몸을 갈아넣는 계획들을 발각당한 조의신에게 권레나는 잔소리를 했다. 영원의 호수 팀은 아까 일이 생겨 가야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조의신을 혼낼만한 이는 권레나밖에 없었다.
잔소리를 하던 권레나에게 푸른 달빛이 쏟아진다.
"⋯아."
그 달빛에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 권레나는 감탄했다. 푸른 달이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레나야, 거기 가보지 않을래?"
어른들이 부재중인 동안의 아주 사소한 일탈이었다. 물론 둘 다 성인이었으니 집 가다가 한눈 판 것 정도로 일탈이라 칭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겠지만.
"어디를?"
"우리가 처음 만난 곳 있잖아."
권레나의 허상연회가 보여준 아름다운 풍경.
"그곳은 밤에 보면 더 예뻐."
특히 달이 떠 있을 때.
둘은 그곳으로 향했다.
.
.
"와, 진짜 예쁘다⋯."
푸른 달빛이 투명한 물위에서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낮처럼 싱그러운 초록이 아닌 청록빛을 띄는 나무와 풀들, 새의 지저귐 대신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날아다니는 나비는 없어도 고요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권레나는 그 풍경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면서 미소짓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권레나에게 시선이 향해있었다. 조의신은 이 사실을 여기까지 와서야 깨달았다.
'음? 그렇다면 난⋯ 권레나를⋯'
조의신이 결과를 도출해내려 할 때 권레나가 말을 걸어왔다.
"의신아."
"응?"
"생각해보면 넌 항상 나를 도와줬었네."
"어⋯."
조의신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약간 덜떨어진 듯한 표정에도 권레나는 그저 가벼운 웃음만을 터뜨릴 뿐이었다.
"하하⋯."
갑자기 웃는 권레나에게 의문을 품을 법도 했지만 그 웃음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조의신은 그저 바라만보고 있었다.
'아, 이거 그건가.'
조의신이 드디어 제 감정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귓볼이 살짝 붉어진 조의신에게 권레나는 다정한 음색으로 속삭이듯 말을 건네왔다.
"좋아해, 의신아."
"⋯⋯나도. 레나야, 나도 널 좋아해."
그 말을 건넨 순간부터 어쩐지 조의신은 시선을 잘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귓가와 목덜미가 조금 붉어진 상태로 시선을 피하는 조의신을 보며 쿡쿡 웃은 권레나는 한걸음 다가가며 다시 한번 말했다.
"좋아해. 의신아, 우리 사귀자."
"어, 어?"
"방금 대답한 거지? 우리 이제 오늘부터 연인이다?"
"어?"
얄궂게 웃은 권레나가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는 조의신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푸른 청월 뒤에 찾아온 새벽의 서월 아래 한 인연이 맺어졌다. 둘이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바라는 무수한 별들이 밤하늘에서 제 몸을 불태웠다.
Fin.
거의 대부분이 성인일 파티지만 어릴적의 염준열과 권레나를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술을 먹는 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이며 권제인과 재러드 리는 일하러 갔다.
차에서 내려 손을 내밀어 권레나의 옷이 구겨지지 않게 내리기 쉽도록 지탱해주었다.
연회장에 들어선 후, 우린 자리를 잡았다. 아직 시작하기 전이지만 사람이 꽤 있었다.
"아, 안녕. 레나야."
귀공자 같은 외모의 염준열이 말을 걸어왔다. 용제건이 옆에서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준열 선배."
"옆에 계신 분은..."
"아, 고모께서 고용해주신 호위 겸 친구예요. 저랑 동갑이고요."
권레나가 나를 소개했기에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조의신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염준열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자신보다 어린 걸 알았지만 초면인 상대에게 존대를 그만두지 않는 친절함이 정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래도 될까요?"
"네."
"그렇다면⋯ 알았어."
"감사합니다."
"나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는 거야?"
뒤에 이모티콘으로 ^^가 붙을 것 같은 말투로 용제건이 말한다. 하지만 환생한 후에도 똑같이 용족들은 팔불출로 유명했다.
"붉은 사자팀은 워낙 유명하니까요."
그 유명도는 전생과 엇비슷했다.
"그래?"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미소였다. 마치, 이 후 파티에서 무슨 일이라도 낼 것 같은ㅡ
"호위, 수고해. 의신아."
"네."
둘이 떠나간 후 권레나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전생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같은 반 친구였던 권레나의 설명이기에 새겨들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파티가 시작되었다. 권레나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아는 얼굴도,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미리 언질받은 인간들을 쳐내고(자꾸만 약혼을 추진하려 한다고 한다.) 권레나에게 서빙되는 음식들을 확인했다.
내가 참석객일 때에는 내 것만 확인하면 되었지만 호위의 역할이 되니 더 까다로운 기준으로 신경을 써야했다. 권레나는 안 해도 된다고 조심스럽게 말리긴 했지만 나는 계약조건이라 하는 거라고 하며 호위 역할을 이행했다.
댄스타임이 다가오자 권레나는 연주자로서 나서기 위해 옷매무새와 바이올린을 점검했다. 감히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와 춤을 추겠답시고 다가오는 인간들을 말로 일일이 쳐내자니 주제를 모르는 놈들에게 조금 짜증이 나긴 했지만 곧 연주 시간이었기에 참았다.
전체적으로 백금색인 드레스에 푸른색 꽃으로 포인트가 들어가 있었는데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부드럽게 미소짓는 권레나는 마치 빛나는 *바이컬러사파이어 같았다.
*바이컬러 사파이어:두가지 색상이 섞인 사파이어
부드럽게 절제된 연주가 흘러나올 때 댄스타임이었음에도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연주를 감상했다. 어떤 이는 눈을 감으며 감상하고 어떤 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멈칫하기도 한다.
커튼으로 가려진 곳에서 권레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연주를 하는 권레나는 정말 행복해 보였고 무엇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연주를 하며 고개가 흔들리는데 머리장식이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어 따스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권레나의 멋드러진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권레나는 잠시 당황한 것 같았지만 곧 웃으며 인사하고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수고했어, 레나야. 정말 좋은 연주였어."
"고마워, 의신아."
손수건 같은 건 없었으므로 행거치프를 건네 땀을 닦게 한 뒤 권레나를 의자로 데려와 앉혔다. 방금 연주를 끝낸 연주자가 쉬는 것을 봤음에도 춤을 신청할만큼 뻔뻔하고 야만적인 녀석은 다행히 이곳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웨이터 복장을 한 사람이 권레나에게 건네는 잔을 대신 받아든다.
'술은 안 먹일거라고 하셨는데, 이곳 사람들 생각은 조금 다른가보네.'
권레나에게 가는 잔을 잡아채고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그것을 돌려보내거나 권레나에게 건네는 대신 한모금 입에 머금었다.
'이건⋯ 인간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작동하는 독인가.'
뱀파이어는 잠깐 고통이 오고 끝이지만 인간이 이걸 먹었다간 큰일이 날 것이다.
'왜 이런 파티에서 독살시도를 하는 거지?'
생각을 이어가려던 찰나였다.
"의신아?"
내가 잔을 가져가 한모금 넘기고는 아무 말이 없으니 권레나가 의아한 모양이다.
"아, 레나ㅡ 커헉."
피가 울컥 쏟아져 나온다.
"세상에, 의신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까 내가 건네었던 행거치프로 권레나가 내 입가를 누른다.
"컥, 케헥! 쿨럭ㅡ"
"의신아, 이게 대체ㅡ!!"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시선이 충분히 모여있었다. 나는 뱀파이어라 이 정도쯤으로 죽지는 않을테지만 이만큼의 이목을 모았으니 쇼를 해야했다.
"아까. 웨이터, 콜록! 그 웨이터가 준 잔ㅡ"
사레가 들린 것인지 목소리가 자꾸만 끊겼다.
“의신아, 말하지 마! 아까 그 웨이터란 말이지?"
권레나가 유난히 동그랗게 보이는 눈을 치켜뜨며 주위를 살폈다.
"이 인간 말하는 거니?"
용제건의 목소리와 함께 아까의 웨이터가 묶여서 입이 막힌 상태로 읍읍 거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이 맞나보네."
"쿨럭!"
마신 독을 죽은 피와 함께 다 쏟아내었다. 독소가 빠지니 오히려 몸이 좋아진 듯 했다.
"의신아, 기다려. 곧 해독해줄 분이 오실거야."
염준열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 해독이 필요없었다.
"괜찮습니다. 스킬이 있어서ㅡ"
"그래도 독이니까 확인은 해보자, 의신아..."
거절하려고 했지만 권레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해독해줄 분을 기다렸다.
결과는 당연히 문제없음이었다. 피를 많이 쏟았으니 빈혈기가 있을 거라며 받은 철분제를 들고 권레나와 함께 파티를 나왔다.
"그 잔, 원래 나한테 왔던 거잖아..."
"그래서 호위로써 먼저 마셔본거야."
"⋯그 전에 받은 음료들은 그냥 다 줬으면서."
"그것들은 이상한 점이 없었으니까."
"⋯의신아."
권레나가 말을 더 잇기 전에 나는 선수쳤다.
"그래도 내가 그런 몸 상태가 되면 호위 일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겠지. 미안해, 레나야."
"그 얘기가 아니라⋯. ⋯알았어."
권레나가 내게 잔소리 하는 것을 포기한 듯 하다. 하지만 이대로면 권레나가 계속 나를 신경 쓰겠지.
권레나가 나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레나야, 그러면 피 좀 받을 수 있을까?"
"어? 아, 응. 피 말이지? 응. 줄게."
우선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받아야겠지만.
미리 준비되어있던 리무진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권레나는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나왔다.
권레나가 내민 팔을 잡으니 바디워시 향이 났다.
천천히 그 팔을 입으로 가져가 피를 빨았다.
"......"
꿀꺽. 꿀꺽. 꿀꺽.
세모금이 넘어간 뒤 조의신은 물러섰다. 상처를 핥아서 없앤 뒤 고개를 든 그의 눈이 어쩐지 붉어보인다.
"더⋯ 안 마셔도 돼?"
"응. 이 정도면 회복하는 데에는 충분해."
권레나는 조의신이 걱정되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권제인과 재러드 리가 돌아왔다.
"레나야! 의신이는 어때?"
"전 괜찮습니다."
"그래? 그레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재러드를 따라 가."
"네."
권제인의 말에 따라 재러드 리를 따라간 후 도착한 방에서 재러드 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붉은 사자 팀에게 연락을 받았어. 독살 시도였다고 했는데."
"네. 레나의 잔에 독이 들어있어서 제가 대신 마셨어요. 마침 해독 스킬도 있었으니까요."
순간 재러드 리는 아주 잠시 표정을 굳혔지만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굳혔다는 착각인 걸지도.
"그 독을 먹이려 한 이의 배후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해."
"⋯그런가요."
붉은 사자 팀이 알아내지 못했다니. 대체 얼마나 철저한 거지?
비슷한 상황을 알고 있다. 나의 전생. 인간인 무명의 초신성일 시절, 그 때의 흑막이⋯⋯.
"하지만, 웅족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왔어."
웅족? 전생과는 달라서 그들의 세력이 약해진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이번 생에도 흑막과 같은 인물이 존재하고 그걸 막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웅족과 관련된 자를 만날 때엔 주의 해줄래?"
"네. 알겠습니다."
재러드 리와 헤어지고 방으로 향했다. 영원의 호수 팀 일부가 내가 수면하는 동안 호위를 한다고 들었다. 아마 독을 마셔서 배려해주는 것이겠지.
하지만 난 잘 수 없었다. 밤새도록 수를 생각해야한다. 전생에서 흑막과 둔 기보를 되짚으며 생각에 빠졌다.
이번 상대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벰파이어 종족이지만 신분은 인간이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진실을 상대가 알아차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후우…"
편안하지만 진정되지는 않는 환경에서 심호흡을 하니 조금은 차분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 상태로 밤을 샜다.
밤은 원래 뱀파이어의 시간이니, 이 때가 가장 머리기 맑아진다.
뱀파이어에게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새벽이 서서히 반짝이기 시작한다.
.
.
"의신아?"
권레나가 웃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네가 잠을 안 잤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까지 권레나에게 전달해주는 건가!
"사실이야?"
상냥한 어조였지만 뼈가 있었다. 유난히 동그랗게 보이는 눈동자가 품은 차가움이 왠지 모르게 두려웠다.
"⋯어제 그 독의 배후를 유추하느라⋯."
"붉은 사자 팀도, 영원의 호수 팀도 못 잡았는 걸⋯? 의신아, 너는 우선 쉬어야해."
권레나의 주장에 따라 나는 함께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호위로 고용된만큼 호위의 일을 하고 싶었지만 재러드 리 또한 밀어붙인 결과라고 해 승복했다.
"다즐링 티야?"
"어? 아, 응. 맞아, 다즐링 티."
"세컨드플레쉬 맞지? 두물차."
"응. 어떻게 알았어? 대단하다!"
대화를 하고 있으니 권레나의 분위기가 풀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에 차 공부를 좀 했었거든. 차는 즐겨마시기도 했어."
전생에서의 얘기지만 사실이긴 하다.
"그러면 혹시 어떤 차를 좋아해?"
"⋯⋯오렌지려나."
전엔 자주 먹었지만 뱀파이어가 된 후로는 거의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인간의 음식을 먹으면 속이 안 좋아지기도 하니까⋯.
"오렌지?"
"응."
"그럼 다음에는 오렌지로 준비할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준비할게."
권레나가 못을 박듯이 한 번 더 말했다. 거절은 못 하겠네⋯.
"알았어. 고마워, 레나야."
그 후 티타임과 담소를 이어가다 방으로 돌아왔다.
"후⋯."
'이제부터 어쩌지⋯.'
작전을 시행하고 싶었지만 감시가 상당했다. 전생에서처럼 '플레이어의 궤적' 광림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뱀파이어로 태어나면서 광림도 바뀌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일어서서 스킬을 발동했다. 오늘까지는 영원의 호수 팀이 붙어있을테니 권레나의 호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과거엔 들리던 시스템 음이 나지 않았다. 처음에야 어색했지만 시간이 흐르니 괜찮아졌다.
뱀파이어가 되고 얻은 스킬 '혈혈단신(血血單晨)'을 사용해 탈출했다. 새벽에 사용할 수록 좋은 스킬이지만 지금 써도 된다. 혼자, 피를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능력이니.
피를 닮은 듯한 안개로 변해 그대로 창문을 스치며 나갔지만 아무도 깨닫지 못하였다. 생명이 담긴 피로 만든 인형은 기척을 알아서 잘 내줄 것이다.
그대로 나온 난 까마귀로 변하였다. 눈이 피 색이라 소름끼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까마귀로.
그리고 난 날아갔다. 전생에서의 미트론의 파티시에. 그가 이번에도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의 가호를 받았을 가능성은 적지만 까마귀의 형태를 취했으니 나를 주시해줄지도 모른다.
높은 곳에서 지형을 살폈다. 사전에 조사해보니 가게들의 위치가 약간씩 변동되어 있었다. 다행히 미트론의 위치는 그대로 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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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론의 파티시에가 이번에도 시델렌티움의 가호를 받아 다행이다. 시델렌티움과의 거래에 큰 것을 걸지는 않았다. 애초에 요구할 내용도 보잘 것 없었으니 말이다.
내 목숨 절반을 걸어 얻어낸 피스이니 가장 적합한 때에 사용해야한다. 난 다시 안개로 변해 권레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다른 아이들은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하러 갔다.
주의할 것은 진족이나 후예의 근처에 가지 않는 것. 그들의 근처로 가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나도 크기에 자제하는 것이 좋다.
맹효돈, 한이, 김유리 등 우리반 아이들을 살폈다. 신기했던 건 목우람이 사기 당하지 않고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 목우람은 뮤즈를 찾고 있었지만 권레나와 대면하는 것은 쉽지 않을 테니 다음에 한 번 도움을 줘야겠다.
이 이상 돌아다니다간 플레이어가 뱀파이어의 기척을 알아낼 수도 있으니 안개로 변한 후 권레나의 집으로 돌아갔다.
"ー!!"
안개인 상태로 창문 틈새로 들어가니 권레나가 방 안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이런ー'
안개라고는 해도 하얗게 보이지는 않는다. 약간 붉은 빛을 띄는 공기를 권레나는 금방 발견했다.
"ー의신아?"
전생에서도 느꼈지만 권레나는 눈썰미가 좋았다. 전생에서 환몽경매 당시 염준열의 모습을 취한 나와 진짜 염준열이 다르다고 깨달은 것도 그렇고 뱀파이어가 취한 안개는 거의 투명한 빛인데 알아챈 것도 그렇다.
안개에서 다시 인간의 형태를 취했다.
"⋯레나야."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하며 권레나를 불렀다.
"⋯⋯어디 갔었는지 말해줄래?"
이건 당연히 말해야한다. 하지만 진실을 모조리 다 말할 수는 없으니 바이올린 장인을 구경하러 갔다고 하였다. 그 장인이 권레나를 뮤즈로 택하고 찾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밝혀져선 안 될 부분을 제외하고 설명하니 권레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알았어. 그래도 앞으로 어디 갈 거면 말해줄래? 더 늦었으면 연락이 갔을테니까."
연락이 갔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 다음에는 말하고 나갈게."
'자세한 내용은 쪽지로 남기고 행선지는 계약자의 권능을 사용하면 되겠지.'
물론, 호위가 필요한 순간은 예측이 불가능하니 정말 급할 때에만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생각이다. 하지만 권레나의 표정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물론 말도 없이 빠져나간 일이 그리 쉽게 용서될 리가 없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고 내 직감이 말하고 있다.
"⋯⋯이번 일은 말하진 않을게."
주어는 없었지만 권제인과 재러드 리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뜻인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영원의 호수 팀이 알리지 않았을까.
"의신아, 내가 널 찾은 이유는 한가지 요청을 받아서야."
"요청?"
"응. 며칠 뒤에 축제가 열리는데 그 축제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말이 나와서 너랑 얘기해보려고 했거든."
4일 뒤, 밤부터 아침까지 진행되는 나이트 페스티벌. 권레나는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과 마무리에서 연주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권레나가 원하기만 한다면 권제인과 재러드 리가 협상해 출장비도 받아낼테니 안전만 확보된다면 가도 괜찮을 것이다.
"시간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내가 활동하는 데에는 문제 없어."
보통의 뱀파이어는 새벽에서 아침이 되는 순간에 가장 약하지만 이름에 새벽이 들어가는 조의신은 오히려 낮에서 밤으로 넘어갈 시간인 저녁이 고되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와서 섭외하기엔 축제가 너무 코앞인 것 같은데⋯.'
내 생각을 알아챈 건지 권레나가 설명해주었다.
"아, 갑자기 나한테 요청한 이유가 원래 연주해주기로 했던 사람이 부상을 당했는데 스케쥴이 따로 없는 사람들을 확인해보니 나 말고는 다 아마추어 뿐이라고 하더라⋯."
본인은 아마추어가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 건지 권레나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갔다.
'아마추어가 안 된다고 하면 권레나밖에 없긴 하겠네.'
연주자의 부상으로 인해 돈을 수십배를 더 내어 연주자를 섭외해야 할 상황이지만 권레나가 간다면 오히려 영광일 것이다. 다름 아닌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한다면 그 축제는 전설로 남을 테니 말이다.
그 뒤 편하게 앉아 더 얘기하다가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갔다.
배달할 수도 있지만 영원의 호수 팀이 차라리 만들어주겠다고 외쳤기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기다려보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비주얼의 식사가 차려졌다.
맛 자체는 나쁘지 않은 정도였고 권레나가 잘 먹는지만 확인하면서 대충 먹었다. 어차피 뱀파이어는 인간의 음식으로 공복을 채울 수 없으니까. 그래도 영원의 호수팀이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는 먹었다.
오히려 권레나보다 더 먹었지만 포만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음식을 많이 먹은 걸 알고 있음에도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는 경험은 생소했다.
잘 먹었다고 감사인사를 한 뒤 잠시 저택 뒷편의 후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소화를 시키는 과정이지만 내게는 필요 없다. 속이 안 좋아지려고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뱀파이어의 고유 스킬을 이용해 체내의 음식물을 조금씩 뱀파이어에게 필요한 성분으로 바꾸었다.
⋯아주 약간 힘이 차오른 것이 느껴졌다. 인간이라면 소화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되었어야 했을 성분들을 이리 복잡한 과정을 통해 에너지로 만들자니 조금 심란했다.
내가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뱀파이어라는 종족에 대해 생각하면서 권레나와 축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 축제는 마을의 고유행사인데 열리는 날짜와 날씨가 정해져 있어서 되게 오랜만에 열린 거래."
"그래? 날씨까지 정해져 있는 건 드문데."
"그렇지? 음⋯ 안개가 옅게 낀 날씨라고 하네."
옅은 안개면 오랫동안 안 열린 이유도 납득이 되었다.
"안개라⋯."
예전에, 뱀파이어들만 사는 성의 서재에서 뭘 읽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성에서는 쫓겨나다시피 했으니 급하게 도망나온 기억은 있지만.
"옅은 안개가 낀 상태로 마을만의 특별한 복장을 입고 춤을 추는 의식 같은 걸 하는 것 같아."
'위험한 의식 같은데.'
안개와 관련된 것을 떠올리지 못한채 대화는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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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당일, 깔끔한 바지와 프릴 셔츠를 입은 권레나와 나는 차에 올라탔다.
"설마 의신이 복장까지 정해져 있을 줄이야⋯."
"그러게. 호위까지 복장을 맞춰야할 정도면 꽤 중요한 축제 같은데⋯."
재킷 없이 셔츠만 입고 있으려니 어색했다. 권레나는 연주를 해야하니 불편하지 않을까 했지만 표정이 평온한 걸 보니 괜찮은 것 같다.
묘함을 느낀 건 마을에 도착하고서부터다.
'⋯저 붉은빛의 옷이 전통복장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프릴셔츠와 깔끔한 바지를 입은 이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들 이외의 사람은 몇 없었고 평범한 복장의 이들은 기뻐보이는 것에 위화감이 든다.
'⋯확실한 건 아니니까.'
확신이 서기 전까지 얌전히 있는 것이 이로울 거란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는데 둘러볼수록 이상했다.
'가면을 쓴 건 둘째 치고⋯'
우리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권레나를 살피니 불편해하는게 느껴진다. 자기들이 불러놓고 사람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다니. 점점 이 마을이 수상해진다.
가면을 쓰고 전통복장을 입은 이 중 하나가 다가와 속삭이듯 말한다.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와 그 호위 분 맞으시죠?"
그렇다고 대답하니 우릴 어떤 천막 속으로 안내했다.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이 무슨 취급이란 말인가! 우선은 천막 안의 의자에 권레나를 앉힌 후 생각에 잠겼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권레나의 연주가 시작된 후에 벌어질 거야. 그러니 우선 주변 지형 파악을 해놓아야겠지.'
아까 한번 쓱 둘러본 장소들을 되새기며 간간히 권레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흘러 이윽고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권레나의 머리를 만져준 뒤 무대에 올린 후 근처에 몸을 숨겼다. 여는 곳은 듣도 보도 못한 곡으로 이 마을에서만 내려오는 축제노래라고 한다. 덕분에 연주자가 되기로 한 날부터 권레나가 악보를 익히느라 고생해야했다.
무사히 진행되는 연주를 감상하다 수상한 기척을 감지했다.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숨긴 건가.'
어느새, 안개가 조금 짙어져 있었다. 옅은 안개일때만 축제를 한다고 했는데 취소되는 걸까? 짙어진 연기를 보니 흐려진 기억 속 하얗고 검은 것들이 재조합 되어간다.
『 몽마』
「안개나무 모습을 띈 식물형 에너미를 길들인 그들은 안개로 사람들을 재운 후 꿈에서 정기를 갈취한다. 진족에 속하는 우리 뱀파이어들도 그 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들과 우리의 활동시간이 거의 반대라는 거겠지. 하지만, 언제나 변수는 있으니 주의사항을 몇가지⋯」
기억나지 않던 책의 내용이었다. 그 주의사항을 떠올리자마자 이 축제가 함정임을 깨달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재빨리 권레나를 향해 달렸다. 막 연주를 끝내고 바이올린을 카드화한 권레나가 나를 보며 당황한다.
"의신아⋯?"
미안하지만 지금 답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재빠르게 권레나를 안아들고 무대 밖, 아직 안개가 옅은 부분을 향해 뛰었다.
안개가 옅은 부분에 도착한 순간, 무대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짙어서 무대가 가려질 정도의 안개가 생성되어 있었다.
"어? 아까까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안개가 짙어지는 것 자체는 눈치 채고 있었구나.'
짙어진 안개를 휘저으며 나타난 이는 느른하게 미소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속삭이며 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어머, 귀여운 도련님이잖아?"
축제를 빙자한 의식으로 인간들을 제물 삼은 몽마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들어봤자 기분은 나쁘기만 하다. 장난스레 미소 지은 그가 태연히도 지껄인다.
"어어? 그런 얼굴하면 안 되지~ 나이로 따지면 내가 네 할아버지 뻘일 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저 녀석에게서 들으니 기분이 나빴다. 전에는 준비하지 못했던 손수건으로 권레나의 코와 입을 막으며 그를 째려보았다.
"그래서? 보아하니 넌 조련계가 아닌 모양인데."
"어머어머~ 궁금한 거야, 도련님? 못 알려줄 건 아니지."
가증스럽게 웃은 그가 한 몽마의 이름을 부르자 평범한 복장으로 인간의 기운을 풍기던 이 하나가 다가왔다. 이가증스러운 현혹계 몽마는 빙글빙글 웃으며 평범한 복장을 한 이에게서 팔찌 하나를 빼내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기운이 가호를 받은 인간에서 진족으로 변하였다. 제 진명의 기운을 어떻게 억누른 것일까. 저 아이템이 신경쓰이긴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더 급했다.
권레나가 내 뒤에서 제대로 코와 입을 막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대화를 시도했다.
"네가 조련계 몽마인가?"
몽마들 특유의 옷을 입은 그녀가 빙그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글쎄⋯ 어떻게 생각하니, 꼬마야?"
도련님보다는 나은 호칭이지만 인간들을 제물로 쓰려고 한 몽마들에게 듣고 싶지 않은 호칭이었다. 얼굴을 찌푸리자 몽마 둘은 푸핫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예정에서 어긋날 것 같지만 그걸 써야하나.'
방관과 침묵의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 그와 거래해 얻은 것은 마족 중 한 종족을 일정기간동안 지배에 두는 것. 기간제라는 것과 정말 강한 이들은 제외하는 조건이 있었기에 내 목숨 절반으로 끝났지만 유용한 피스였다.
여기서 써버리면 일정들을 앞으로 당겨야하겠지만 큰 문제는 없겠지. 까마귀 마왕에게서 받은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목걸이를 꺼내 이능파를 불어넣었다.
"ー!!"
"막아!!"
두 몽마가 당황하여 애완계 식물형 에너미, 가칭 '안개나무'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소용 없었다. 손톱을 세워 손등을 긁은 뒤 나온 피 소량으로 에너미를 묶어내었다.
"안 돼! 내 몽목(霿木)!!!"
순간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에너미라지만 이름을 그렇게 대충 지어도 되는 건가? 자욱한 안개의 나무라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날리며 이능파를 담은 목소리를 안개에 퍼뜨렸다.
"앞으로 이 축제랑 이 축제와 비슷한 모든 일을 하지 마."
명령에 의해 두 몽마가 발악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인간들의 정기를 빨아먹고 산제물로 써왔고, 이번에도 그러려고 한 이 녀석들을 한바탕 패버리고 싶었지만 권레나가 있으니 영원의 호수 팀에 맡겨야 할 것 같다.
주인의 명이 사라지자 멈춰있던 몽목은 이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권레나에게 손수건을 내려도 괜찮다고 한 뒤 재러드 리에게 연락했다.
워낙 일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런 사항은 재러드 리에게 말하는 것이 옳으니까.
연락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에어 리무진을 타고 두 사람이 도착했다. 권제인과 재러드 리는 권레나를 살핀 후 내 몸 상태도 살폈다. 그 후 영원의 호수 팀이 몽마들을 구속해 데려갔고 난 발악하려던 몽마들에게 조용히 명령을 내려 그들이 얌전히 협조하도록 도왔다.
'배후를 불라고 명령했을때 들은 이름은 기억에는 없지만 확인은 해두는게 좋겠지.'
종족 전체에게 명령을 내렸으니 아마 꽤 힘있는 강자들 외에는 인간들을 산제물로 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에어 리무진에서 잠이 든 권레나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 생각을 이어간다.
'몽마의 지배권을 손에 넣은 건 예상 밖이지만, 오히려 편할지도 몰라.'
원래 계획과는 달라지겠지만 몽마를 활용하는 계획을 세우면 될 것이다.
'문제는⋯ 지배가 안 된 강한 이들인데⋯'
원래는 뱀파이어를 지배하려고 했었다. 뱀파이어 중에 지배되지 않을 만큼 강한 이들은 나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거나 호감이 있는 이들 뿐이니 방해 받을 걱정이 없으니까. 하지만 몽마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종족에 대해 자세하게 쓰인 책을 훔쳐올 걸 그랬다. 시스템은 없어도 아이템 창과 상태창을 보는 능력까지 그대로 넘어왔으니 말이다.
'지금 내 광림은 싸우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뱀파이어라도 약간의 손해만 감수하면 되는 정도고.'
내가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배척받은 이유 또한 광림에 있었지만 지금은 피곤했다.
'까마귀 마왕과 거래해 얻은 그 지배권을 쓸 때, 대가가 필요하다 했었지.'
한 종족을 지배하는 건 일정기간일지라도 힘이 필요하다. 그 대가를, 치뤄야했다. 피곤하다못해 누군가에게 수면제를 주사당한 것 마냥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수석에서 날 돌아본 권제인이 조용히 말했다.
"피곤하면 자도 괜찮아, 의신아."
내가 권레나와 동갑인 것 때문인지 영원의 호수팀은 조금 물렀다. 호위 역할을 할 때에는 제대로 대해주지만 호위 역할을 할 필요가 없을 때는 권레나의 친구처럼 대해준다.
어쨌든, 권제인이 자도 괜찮다고 했으니 나도 더 이상 쏟아지는 졸음을 막지 않았다. 잠을 허용함과 동시에 몸에서 대량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눈을 뜨니 도착에 가까운 상태였다. 얼마 못 잔 건가. 왠지 모르게 또렷한 정신 상태에 곧장 이후 계획들을 점검하려고 했지만 이상을 발견했다.
'몸이 작아⋯?'
대가였다. 내가 살아온 세월. 그것이 대가로 빼앗겼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고작해야 몸에 상처가 생기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왜!
키가 갑자기 엄청 크기 시작한 때의 모습인 건지 권레나와 내 키가 엇비슷해 보인다. 권제인과 재러드 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호위에서 잘리는 건 곤란했다. 피를 섭취하지도, 계약자를 돕지도 못한 뱀파이어는 그대로 소멸될테니까.
살며시 고개를 들자마자 권제인과 눈이 마주쳤다.
"ー!"
권제인이 나를 보고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광림의 부작용이니⋯?"
순간 혹했지만 나중에 광림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면 곤란해질테니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과의 거래 사실만을 숨기고 얘기했다. 권제인과 재러드 리는 그것을 듣고 판단은 빠르고 나쁘지 않았지만 다음부터는 영원의 호수팀에게 연락을 취하고 도망을 다니라는 말을 들었다.
혼나고 난 뒤 잠에 든 권레나를 굳이 깨우지 않고 안아 들어 이동했다. 권레나의 방 앞에서 권제인과 인사한 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씻으면서 사고를 이어본다.
'피를 흡수해서 육체 자체를 재구성하면 다시 성인 모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권레나가 협조해줘야하지만 피곤할테니 상태를 보고 부탁하는 것이 좋겠지. 계약중이 아니었다면 인간쓰레기들의 피를 강탈해 몸을 재구성할 수 있겠지만 권레나와의 계약이 끝나지 않는 이상 다른 이의 피를 빠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시만, 계약기간이 권레나, 혹은 나의 생이 끝날 때까지니까⋯'
권레나에게 부탁하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 확실하다. 샤워를 끝내고 몸을 말린 뒤 약간 큰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몸을 파묻어 잠을 청했다. 아까부터 심히 졸리는 것이, 대가를 전부 가져간 것이 아니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