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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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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제건x김신록

익숙하고도 괴로운 갈증이 점차 신체를 범람한다. 이마 줄기를 따라 식은땀 한 방울도 한 차례 흘렀다. 시야는 점점 흐려진다. 목 안쪽으로 타들어 가는 감각이 더욱 괴로움을 안겨준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 두 발은 버겁다. 이동하는 내내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입가에 자조를 머금어도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절로 새어 나오는 한탄을 그저 꾹 참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태로는 위험하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미루어왔던 결정의 순간이 끝내는 도래하였다는 점도 새삼스레 깨달을 수밖에 없다. 숙명과 다름없는 두 가지의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해묵은 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의 생을 바스러트릴지를. 혹은 제 생을 스스로 마감할지를. 태초부터 그러하였다. 대대로 저주받은 그의 종족은 타인의 목숨에 기생하여 사는 존재다. 그리하여 질긴 생명을 유지해온 자들이다. 그러나 한때는 끊임없이 타오르던 생명의 불꽃일지라도 사그라질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힘없이 수그러진 고개는 첫 번째 증거요, 시체와 진배없는 창백한 몸이 기어코 바닥으로 무너지는 모습이 두 번째 증거이며, 무력하게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점이 마지막 증거가 되어준다. 그리 도달한 끝은…, 암전이었다.

사그라지는 마지막 의식 속에서 언뜻 누군가가 제 몸을 받쳐주는 듯하였다. 아니 그리 느끼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정작 꺼낼 일 없을 제 마지막 미련이다. 또 한 번 입가에 자조를 머금었다. 자초한 일이다. 잠깐 얼굴을 본 사이고 유일한 친우라며 불러도 될지 의문이지만, 내밀어 준 손마저 내친 주제에 그 사람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제 착각일 게 분명하다. 제 이성은 그리 판단하였음에도 맞닿은 체온은 굳은 믿음을 가진다. 확신을 끼얹는다. 그는 그때처럼 뜨거우면서 비릿한 제 호흡을 나누어주었다. 어떻게든 ‘나’를 살려내던 마지막 호흡이었다. 그러하였던 그가 몇 번의 시도 끝에 표정 없이 내려다보는 시선이 마지막으로 느껴진다. 제 뺨을 어루만지는 서늘한 손길이 마지막으로 닿는다. 제 몸과 달리 세차게 뛰는 불온한 심장 박동이, 바스러질 듯한 숨결이, 마지막으로…, 들렸다.

그럼에도 아직. 왠지 모르게 아직은. 그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단 하루의 만남이었을 뿐인데도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제 곁에 존재하지 않은 이라고 냉정하게 사고한들 입술은 제멋대로 달싹이고 있다. 말하고 싶었다. 부르고 싶었다. 끝없는 어둠이 집어삼키기 전에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떠한 말을…? 알 수 없었다. 벽을 마주한 주제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문장을 이루려던 단어들이 미아가 되어 흩어진다. 더는 기억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모든 걸 잊기 전에 필사적으로 붙잡으려고 하였다. 후회되지 않을 진심을, 짧은 만남의 기억과 더불어 떠올린다. 다만 눈이 녹듯이 빠르게 손끝에서 사라지는 감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무엇을 전하려고 하였더라―…?

 

 

 

해당 기억을 복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해당 존재에 대해 신원을 확인합니다.

Error !!

규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용■의 권한… 개입■ …작…■다.

 

 

 

“……!”

소리 없는 비명이 토해진다. 상체가 용수철처럼 튕기며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젖은 등은 축축하다. 이마에서도 땀이 흘러내린다. 호흡은 아직 거칠다. ―그럴 리는 없지만―거센 맥박이, 뜀박질이 귓가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제 상태를 차근히 짚어갈수록 점차 안정을 찾는다. 후우, 한숨과 같은 숨을 마저 토해내었다. 제 머리칼도 한 두어 가닥 흐트러진다. 아직 잔 떨림이 느껴지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슬아슬하게 맺힌 땀을, 제 붉은 머리칼을 시원하게 드러내며 쓸어 올리는 손짓을 하였다. 이내 낯선 방 안의 공기가 체내로 들어왔다. 그제야 제 고개가 살며시 기울어진다. 제 두 눈동자 속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뒤늦게 담아낸다. 낯선 방. 낯선 공기. 낯선……, 향.

“…안녕.”

낯선 향이 코를 자극한 순간 몸을 틀었다. 아니 그러려고 하였다. 제 시야 속으로 불쑥 들이민 고개만 아니었다면…. 분명 제 생각대로 움직였을 터다. 제 몸이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추태를 부렸을 상황이 손쉽게 그려졌다. 잠시 아찔하였다. 그러나 낯선 얼굴이 제 두 눈에 들어오자, 몸은 뻣뻣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옆에 있던 건지 모른다. 그는 제 시야 속에 들어오고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본질을 꿰뚫는 듯한 시선이다.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그의 입가에 자리한 여유로운 미소는 한층 더 짙어진다. 능글스럽게 미소 짓는 모습에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낯선 친숙함이 들었다. 처음 보는 ‘인간’이었음에도―.

물이라도 마실래? 부드러운 어조가 귓가에 닿는다.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던 건지 남자의 몸이 물러간다. 닿았던 열기도 사그라진다. 곧 작은 탁자에 놓인 잔을 건넨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익숙해 보였다. 거부할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제 손에 잔이 들린다. 손가락 끝에 스치듯이 닿은 감촉은 다시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아슬아슬한 파동이 일렁였다. 애써 시선을 내려 잔의 표면을 매만진다. 표면은 매끄러웠음에도 어쩐지 미적지근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감사하다며 넙죽 받아 마실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인간들이 주로 마시는 물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따로 있었다. 그렇기에 제 정체를 언급하기도 꺼려졌으며 위험한 도박을 걸 마음은 없었다. 그저 메마른 입술만을 축였다. 조금씩 울렁거리는 갈증도 목 안쪽으로 흘려 넘긴다.

대신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사소한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습격을…, 받았었나? 제 종족은 본질이 같고 아군이라 한들, 무한(無限)한 생명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도 존재하였다. 그들은 보통 인간들의 생을 갈취하는 거로 끝내지 않는다. 동족에게도 쉬이 피를 묻히는 놈들이었다. 한 번이 어려울 뿐이지, 두 번째는 쉬운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래서 인간보다 동족을 더 조심해야 했다. 도망쳐야 했다. 갈증이 더 짙어질 수밖에 없는 이 겨울을 버티면서 생존 게임을 벌여야 했다. 겨울의 끝자락에 들어서면 그들의 추적은 집요해지고, 이제는 뛰지 않은 심장을 죄일 만큼 숨죽인 채로 지내야만 하였다. 그런 이유에 가깝게 제 옆에 있는 남자가 구해주고 데려온 걸까?

답은 금세 나왔다. 보일 듯 말 듯 고개가 가벼이 내저어졌다. 습격을 당했더라면 몸 어딘가 다쳤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제 몸은 다친 흔적이 한 군데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개운함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그들의 감시망을 피해서 도망 다닌 건 사실이나, 전날의 기억은 오랜만의 휴식을 취한 날이었다. 바깥에서 종일 내리는 눈을 맞이하였다는 걸 떠올렸다. 숨죽여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기억하였다. 오래도록 제 숨을 확인하며 맛본 ‘마지막’ 휴일이었던 걸 기억하였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몸을 움직였고, 어떤 사람과 부딪쳤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른다. 그는 대부분 음영으로 드리워진 사람이었다. 그림자였다. 기억 속에서 두 사람의 간격이 한층 가까워졌다. 그 순간 그늘진 아래로 붉은빛을 담은 탐욕이 제 갈증을 자극하는 걸 느꼈다. 탐욕은 저를 유혹하듯이 서서히 호선을 그렸으며……,

“…헉, 크읍!”

급히 제 목을 부여잡는다.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을수록 촉각도 곤두세운다. 낯선 향이 다시금 제 코를 자극하였다. 억누르던 갈증은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파노라마처럼 전날의 기억이 겹친다. 기억과 기억들이 뒤엉켜 들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목 안쪽이 괴롭기만 하여 신경 쓸 틈은 없었다. 그저 제 갈증이 갈망으로 변해가고, 제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지는 걸 느낄 뿐이다. 제 숨이, 호흡한다는 게…,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지러운 머릿속은 한 가지의 의문을 싹 틔워낸다.

― ‘나’는 어제 이 남자의 목을 물었을까….

그러한 의문이 든 순간이었다. 제 갈증은 불이 붙은 듯이 참기 힘들었다. 호흡이 더 버거워진다. 용솟음치려는 충동이 들끓었다. …이런, 잠시만 실례할게. 남자의 곤혹스러운 침음이, 이해할 수 없는 말소리가 멀게 들려오는 듯했다. 다만 제 귓가에 끝까지 다다르지 못한 목소리다. 제 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는 한층 더 가까이 거리를 좁힌다. 옆에서 생명이 박동하는 감각도 인지하지 못한다. 제 충동을, 붉게 물드는 시야를 억누르는 데 급급할 뿐이다. 입술에서 번지는 열기가 정신을 일깨우기 전까지 상황 파악할 여유도 없었다. 두 눈동자는 뒤늦게 놀라며 느릿느릿 깜박인다. 일정한 호흡도 되찾는다. 비로소 시야에서 붉은빛이 사그라질 무렵에서야, 어떠한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딱히 흘러나오는 소리는 없다. 그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머릿속 사고가 처음엔 영 돌아가지 않았다. 들끓던 갈증은 금세 가라앉았고 두 눈이 멍청하게 깜박였다. 그게 전부였다. 입술에 닿았던 열기는 더 불을 지필 듯하였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색할 정도로 식어간다. 다시 한번 두 눈을 깜박였다. 몇 번의 반복 끝에 그제야 한 인영을 담아낸다. 이번에도 멍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런 경험을 해본 듯이 그는 익숙하면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라 그리 보였을 터였다. 그러한 착각을 주었다.

“어때, 괜찮아?”

정신을 확 깨우는 방법 좋지 않아? 덧붙이는 내용이 없었더라면, 한참 더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제 얼굴이 일그러진다. 재미없는 농담이다. 휙 고개를 치켜들어 올렸다. 어떻게 보든 같은 눈높이지만, 사납게 노려보는 두 눈빛이 드러난다. 마주한 두 눈동자는 여전히 저를 담아내고 있었다. 심지어 재미있다는 듯이 두 눈매를 접기도 한다. 그의 입가는 짙은 호선이 그려진 채다. 왠지 모를 얄미운 감정이 솟아오른다.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비껴가는 시야 속에서 우연히 비친 그의 두 눈동자가 언뜻 옥색으로 물든 듯해 보인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걸 무시한 채 주위를 자연스레 둘러본다. 여기는 어디냐고 묻기엔 평범한 집이며 방안이었다. 어느 정돈 사람답게 사는 그의 집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을 주었다. 그저 타인의 방이 그리 느껴질 뿐인데도 썩 불쾌하였다. 천천히 둘러보던 고개는 낯선 향에 차츰 익숙해질 즈음에야 제자리에 멈춘다. 구경을 방관하고 침묵을 지키던 남자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어떠한 요구를 바라는 듯한 표정이다. 호선을 그린 입술은 목적을 가진 채였다. 이내 천천히 열리는 입술은 제 목적을 말한다.

“네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어투다. 한껏 경계심을 끌어올린 제가 우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단순히 제 이름이 궁금하였을 뿐일까…. 수년간 다진 경험은 의문을 품게 하였다. 아직도 의미 모를 미소 짓고 있는 사내의 의중이라곤 무엇하나 파악할 수 없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래. 제 의심스러운 눈길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는지 은근히 수상쩍은 대답이 돌아온다. 어제…, 아니 지금 처음 보는 거나 다름없는 낯선 타인에게 살갑게 굴며 친해지자고 하는 게 쉬운 일인가? 제 의구심이 깊어진다. 만일 진짜라고 하여도,

“친구…, 없어?”

이번에는 제 어투가 조심스레 흘러나온다. 그러자 제 말 어디에서 웃음 포인트가 걸린 건지 그의 미소가 더 짙어진다. 왠지 모르게 피하고 싶어지는 미소였다. 그럼에도 기이하게 이러할 때는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경고와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두 직감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 또한 들게끔 하였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듯이 움직임이 다소 어색함을 담는다. 제 최대한의 반항은 조금 전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게 다였다.

알려주지 않을 거야? 한참을 기분 좋게 생글생글 웃던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나직한 목소리는 다시 답을 요구하였다. 흘깃 그를 노려보는 건 잠시뿐, 시선을 거두고 한숨을 내쉰다. 딱히 알려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망설이게 된다.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내디디는 기분이다. 그이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감정이 요동칠 뿐이다. 아니면 그저 ‘나’는 그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걸까….

“…김신록.”

제 이름을 입술 위에 조그맣게 올려놓는다. 동시에 문득 어떠한 영상이 제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 듯하였다. 한때의 정확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찰나의 잔상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어째선지 두 눈을 뗄 수 없었다. 제 곁에서 표정을 살피고 있는 그와 연관도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스쳐 지나간 영상 속에서 그가 구슬피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정정한다. 그의 두 눈동자가 그리 보일 뿐이었다. 무뎌지고 싶어도 그러할 수 없고, 그동안의 세월을 감당해온 두 눈이었다. 그가 가진 감정이 닿는 듯해 속에서 울컥거리는 감정이 치밀었다. 계속 알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타인이라며 거리를 두려고 해도 그에게서 두 눈을 뗄 수 없었다. 울렁거리는 감정을 확인할 겨를도, 어쩐지 일그러져 보이는 표정에도 어떠한 말을 담기 힘들었다.

【…신록아.】

그렇구나. 제 시선이 신경 쓰일 법도 한데, 그는 그저 입 모양만으로 작은 소리를 내었다. 잘 들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의미로 다가왔다. 역시, 너는…. 호흡을 한 차례 쉰다. 【이번에도 내가 부르는 네 이름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구나.】 입술이 또 다른 글자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중간에 시야가 이지러져 보지 못하였다. 잡음 또한 낀 듯했다. 생각보다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말이 잘 들려오지 않은 건 아닐까 싶었다.

“…그보다 피, 필요하지 않아?”

“……!!”

그새 제 감정을 갈무리한 건지 그는 돌연 조금 전과 별다른 바 없는 미소를 지었다. 급작스러운 질문을 하였다. 움찔, 몸이 튀어 올랐다. 인위적인 위화감도 들었으나, 질문 속에 포함된 한 단어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귓가에 단단히 박혀 들었다. 어째…서? 그저 당황스러운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이름이라는 정보 값만 넘겼을 뿐인데, 그는 제 정체를 단번에 파악한 듯했다. 아니면 진즉 눈치챘던 걸까. 사실은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였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그다음으로 들었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진다. 점점 울렁거리는 속과 하얗게 비워지는 감각이 든다.

경계심이 잔뜩 올라간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리며 그를 노려본다.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려고 등도 물렸으나, 물러설 곳이 없는 막다른 벽의 딱딱한 감촉만 느껴진다. 제 반응을 예상한 건지 그는 태연하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다. 제게는 ‘별거’라는 일로 치부될 수 없었기에, 더더욱 꼬리를 바싹 세운 채 경계심을 키워내었다. 그렇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에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라면 줄 수 있어.”

“…뭐?”

【신록아,】 너는. 느긋하게 지칭하며 손을 들어 올린다. 이내 한 손가락이 유려함을 드러내며 펼쳐진다. 그의 손가락 끝은 ‘나’를 확고하게 가리킨다. 여기. 단호한 음성이 까랑까랑 맑게 울리는 듯하였다. 이쪽이 망가져 있지? 얼마간 한 방향에 머물던 손가락은 본인의 심장 쪽으로 천천히 방향을 바꾼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옥색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가 진중하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제 시선이 절로 그의 입술이 아닌 심장 부근에 댄 손으로 향한다. 모든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펼쳐짐과 동시에 시선이 닿는다. 나는,

“너를 치료할 수 있어.”

이 또한 단호한 울림이었다. 가능할 리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필요한 피를 흡수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에 대해 방황을 시작하였을 무렵부터, 그 이후로 오랫동안, 웬만해선 인간들의 피를 원치 않아 하였다. 기본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제 본능은 두 가지의 감정으로 흔들었다. 피를 원하게 하였다. 또는 바라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충돌시켰다. 그래서 버텼다. 참견이 좋은 동족이 도움이랍시고 억지로 마시게끔 해도―목구멍 너머로 넘어간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제 안에서 미칠 듯한 갈증이 마구 날뛰어도, 어떻게든 토하고 억눌렀다. 설령 생을 바스러트릴 일을 앞당긴다는 걸 알게 되어서도…, 지금까지, 쭈욱―, 버텼다.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제 한계는 재빠르게 찾아오는 건 역시 업보겠다만.

이제 남은 시간이라곤 고작 하루다. 단 하루만의 시간이 남았다. 아니 이제는 얼추 반나절 정도 남았을 터다. 주어진 제한 시간은 하루살이나 다름없을 뿐이다. 그렇기에 만일 그의 피를 마시고 괜찮아진다고 하여도, 연명의 시간을 고작 조금만 늘려줄 뿐인 임시방편이다. 늘 목구멍 너머에서 들끓는 갈증을 주체할 수 없을 게 분명하였다. 더 바라고 바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끊어내고 싶은 욕구였다. 또한, 제게 종언이 찾아오기 전의 유일한 유희 시간이었다. 이 세계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니었기에 ―….

“나는 네가 필요해.”

조금 표정을 일그러트리는가 싶던 그의 뜬금없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너와 친구가 하고 싶거든. 앞서 말한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다. 단지 진심이 담긴 단순하고도 사실적인 소원을 담담히 고한다. 방금 보였던 모습은 제 착각인지 그의 입가에는 다시 생글생글한 미소가 자리하였다. 마치 더는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듯해 보였다.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그의 미소가 씁쓸해 보였다. 이마저도 제 착각으로 넘기고 싶어질 만큼.

안 돼. 그러나 대답에 대해선 그리 긴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그가 필요를 요구하더라도, 친구를 할 수도, 될 수도 없었다. 제 단호한 고갯짓에 그는 예상한 건지 담담한 표정이다. 대신 의미 모를 제 두 눈을 가리키는 동작을 하였다. 처음은 그의 두 눈동자를 감상하라는 뜻인가, 예쁘긴 하다만, 하고 생각하였다. 일단 생각보다 나름, 예쁘게 보이는 두 눈동자를 미간을 좁힐 만큼 노려봐주기도 했다. 그러자 무엇이 웃긴 건지 짙은 미소를 그려낸다.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정말로 즐거운 미소처럼 보였다.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씁쓸하게 움직이는 입 모양을 따라 천천히 읽어내었다.

붉어졌어. 꽤 농홍(濃紅)한걸. 그 의미를 곧바로 알아챘다. 곧장 제 몸의 상태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인식하고 나니 목 안쪽에서 또다시 들끓는 갈증이 느껴진다. 제 갈증은 여전히 작은 불꽃을 터트리며 자극하고 있었다. 갈증은 갈망하였고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래도, 아직, 호흡은, 할 수 있었다. 제 갈증이 언제 바깥으로 표출될지는 안심할 수 없긴 해도 여유가 없는 건 아니다. 주어진 유예 내로 그의 집에서, 그에게서 벗어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다시는 마주하지 않으면 끝인 이야기였다.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제 생각을 눈치라도 챈 건지 담담하고도 씁쓸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마주한 시선을 떨어트릴 타이밍을 놓치고 불편한 침묵이 흐르도록 둔다. 더는 마주하기 힘들어질 즈음에야, 어색하게나마 시선을 아래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너를 보내줘야 하는 거 알아. 【계속 그리했었으니까….】 머리 위에 닿는 목소리에 흔들림이 있다. 또다시 깨진 듯한 음성으로 들린다. 【이렇게 욕심을 부려도. 이 세계는 나의 개입을 허하지 않아.】 그렇지만 어쩐지 물속에 잠긴 듯한 목소리처럼 느껴진다. 너무하지 않아? 거의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마지막 문장일 뿐임에도. 무엇이 너무하다는 걸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며 묻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엄습한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하였을 터다.

【나는 이 세계를 좋아할 수 없어. 오히려 싫어하는걸. 그래도 네가 늘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세계를. 어떻게든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야. 아, 노력 중이라고 해도 쉽게 좋아지지 않아서 정정해야 할까. 세계를 향한 ‘나’의 감정은…, 그래. 실은 ‘애증’인가 봐. 네가 이 세계 속에 있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어. 그래서 좋아해. 네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어. 세계가 늘 너의 죽음을 번복시킬 때마다 증오는 커져 가. 그러니까, 애증이야.】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까 받아 들었던 잔이 어느새 반으로 쪼개져 뒹굴었다. 또 다른 반쪽은 몇 조각으로 더 흩어진 채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그저 얼떨떨하게 바라보자, 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생글생글 웃는 낯의 가면을 쓴다. 하나둘씩 깨진 조각들은 제 손에 주워 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화풀이한 것처럼 보였겠지만, 이전의 말은 들리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확인하는 듯한 질문은 대답까지 바라지 않은 지, 조각들을 손에 쥔 채 곧장 자리를 비운다. 다시 그가 방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의문 속에 내던진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돌아오고 제 옆자리에 다시 앉을 즈음에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게 느껴졌다. 그의 두 눈동자는 어느덧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제가 모르는 애정 또한 있었다. 제 종족과 무분별하게, 온전히 온기를 줄 수 있는 이의 그러한 애정이, 어릴 적부터 또 다르게 갈구해오던 애정 어린 시선이었다. 처음 본 타인을 이렇게까지 깊은 애정을 줄 수 있는 시선일까 싶을 정도다. 다만 한편으론 제 심장을 찌르는 비수였다. 당신은 ‘나’에게서 누구를 투영하고 있는 거지? 왜 그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할 수 없었다.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바라던 답이 되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그렇기에 무섭다는 감정은 선뜻 물을 수 없게 붙든다. 그래도 용기 내고 싶었다. 다만 제 입술은 착 달라붙은 채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있는 힘껏 달싹여도 소용없었다. 흐르는 숨조차 버겁게만 느껴진다. 결국은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는 걸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럴 때도 아닌데.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한 번 비껴간 타이밍을 잡아채기에는 모호하다.

그래도 가야 해. 움직여야 해. 어서 이곳에 나가고…, 어디론가 잠깐 머무른 뒤에……. 어색한 침묵을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사고하는 머릿속이 돌연 멈춘다. 갑작스러운 충격이 닿았기 때문이다. 집 없는 생활은 딱히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떠도는 삶이 익숙하였다. 그렇지만 어째선지 정말로 갈 곳 잃은 미아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애써 털어내려고 해도 더 들러붙는다. 지워지지 않은 상흔처럼 찝찝함을 남길 뿐이다. 아직 몸이 안 좋은 거 같네. 그새 틈을 타 설득하려는 목소리가 문득 들려온다.

동시에 손에서 작은 온기가 느껴진다. 무심코 제 손으로 시선이 향하였다. 제 손은 지금의 겨울처럼 지독하게 시리게 느껴질 텐데도, 그의 손은 아무렇지 않게 일정한 리듬을 주며 다독인다. 마치 자주 해본 일이라는 듯이 익숙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도 했을 손길은 금세 제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이유 따위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미약한 온기는 익숙지 않은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독이는 손짓은 느려지고 슬며시 제 소맷자락을 붙잡는다.

“……?”

시선을 다시 들어 올렸다. 또다시 마주한 건 옥색의 두 눈동자라고 생각하였는데, 뜻밖에도 그의 정수리가 먼저 보였다. 깊게 들이쉬는 숨소리가 무겁게 들려온다. 무언가를 참아내는 듯해 보였다. 아니면 다짐처럼 다가온다.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어떠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올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동안은 꼼짝없이 그에게 소맷자락이 붙잡힌 채로 둘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괜찮은 걸까. 걱정될 즈음에 망설이던 입술을 조금이나마 달싹여본다. 겨우 용기를 낸 입술은 생글생글한 미소로 대하는 모습에 갈 곳을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왠지 모르게 눈치채버렸다. 알 수 있었다. 타인이었지만 알게 되었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지금 일부러 미소 지으며 속을 감추어내었다는 점을. 진심을 담으려던 내용조차 삼켜낸 채라고. 그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하려고 한다는 걸. 그래서 그는 웃고 있었으나, 그만큼 그의 표정이 더 보이지 않은 듯하였다.

나중에 의식이 꺼질 즈음에 떠올렸던 그 미소는 뒤돌아 생각해보게끔 하였다. 그의 표정이 알 수 없었던 건 당연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도 찰나 스쳐 지나갔다. ‘나’뿐만 아니라 당사자도 모를 표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다만 마지막이 되어도 그의 이름 정돈 들어볼 걸 그랬나. 그러한 작은 후회가 함께 담겼다. 그럼에도 ‘나’는 어째선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부를 수 있을 듯했다. 뒤늦음을 감지하였음에도 마지막으로 입술을 달싹인다. 작게 중얼거려보았지만, 새된 소리만 흘러나온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무사히 제 입안에 담아내었다면 좋을 텐데. 그래도, 제대로, 그의 이름을, ‘나’는 불러주었을까….

 

 

 

지직…, ■■호(虎)의 기억을 재조정합니다.

 

 

 

‘안녕.’

이만 갈게. 잠깐이나마 구해줘서 고마웠어. 그러한 의미를 담고 정말로 마지막 작별 인사하였다. 그의 집에서도 서서히 멀어졌다. 그는 붙잡지도 따라오지도 않았다. 미아처럼 방황하는 발걸음은 그저 정처 없이 걷게 놔두었다. 걷고 또 걸었다. 떠도는 나그네와 다를 바 없이 인파 속으로 숨어든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은 애써 억누른다. 대신 짙게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기 중에 입김이 흩어진다. 시야를 가렸다. 무심코 제 입술을 매만져 보았다. 그러자 떠오르는 기억이 천천히 재생되었다.

조금은 부끄러운 기억을 지워내 보려고 한다. 이 기억은 단지 상흔과 다름없음에도 그만큼 제 뇌리에 똬리를 튼 듯이 깊게 박혀 있었다. 점점 입술에 열기가 모이기 시작한다. 남몰래 숨을 들이켰다. 입술에 모인 열기는 그새 몸으로 퍼져간다. 더 나아가 심장에 닿은 듯이 느껴졌을 때. 딱 그 순간에 조금은 맥박이 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제 심장이 마치 살아있는 인간처럼 몇 번의 박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는 제 상상일 뿐이다. 착각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알고 있다. 제 심장은 오래전에 뛰었고 멈추었다는 기억하고 있다. 다만 제 몸이, 입술은, 기억만으로도 달아오르게 하였다. 심장에 활력을 주었다. 조금 더 그의 체온을 원하게 하였다. 알 수 없는 그리움도 함께…, 건네주었다.

그사이에 또 다른 갈증이 제 몸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견뎌내기 힘들었다. 폐부에 들이차는 숨마저 버거울 정도이다. 갈증과 갈증이 뒤섞여 들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주체가 모호해진다. 그저 빨리, 다른 곳으로, 가야 해. 눈에 띄기 전에,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야만. 어떻게든 되뇌고 의식을 유지하며 발걸음을 서두른다. 비틀거리고 사람들과 부딪쳐가며 겨우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른다. 다행이었다. 때마침 제 몸이 추가 짓누르는 듯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호흡은 점차 불안정해진다. 숨 쉬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호흡만큼은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주었으나, 더는 숨이 버거워지지 않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기나긴 생 동안 괴롭히던 추위도 더는 존재하지 않다는 점도 깨달았다.

문득 제 머릿속에 한 인영이 떠오른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난 이의 모습이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조금이나마 입꼬리를 끌어당겨 올렸다. 여전히 그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참기 힘들었을 터였다. 그를 그대로 덮쳤을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지금, 언제나처럼 홀로 남아서 다행이었다. 그에게서 멀어지길 선택하는 게 정답이었노라고, 후회스럽지 않다고 여길 수 있었다. 이제는 흐릿한 두 눈을 깜박여 본다. 흐린 시야 너머 새하얀 무언가 내리는 게 보였다. 눈…, 이려나.

어느새 제 뺨에 눈이 차분히 내려앉는다. 생각보다 차갑지 않은 온도였다. 의외로 따스함도 있다. 금세 녹아내리긴 하였지만, 나쁘지 않은 감촉이었다. 아니면 이 또한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 그저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삐이익―. 이명이 짧게 울리고 끊긴다. 더는 생각을 이을 수 없는 절취선 아래에 존재한다. 마지막까지 붙들던 남자의 기억도 한순간에 사그라진다. 결국 무엇도 떠오르지 않은 캄캄한 어둠이 반겼다.

다만 그의 소원만큼은 이루어지길 바랐다. 어쩌다 눈치채버리고 만 그 소원을. 그렇기에 다음에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가 바라던 형태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한 번 더 이루어지는 만남이 그에게 기쁨이기를. 친구가 되어 기어코 입안에 담아내지 못하던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농담처럼 주고받는 날이 오기를. 이루지 못하였던 소원이 다음에는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그 모든 것을 대신하여 제 입안에 굴려내며 중얼거려본다. 아쉽게도 이 속삭임은 그에게 닿지 못하겠지만, 그러니 또다시 짧게나마 그의 이름만이라도――.

 

 

 

지직…, 외부의 존재를 감지하였습니다.

Error!!

이 이상은 간섭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신록아….”

김신록의 이름이, 단어가, 그 존재에 대해서, 지워지며 흩어지는 게 느껴진다. 잡음 또한 끼어들었다. 손에 붙들고 싶어도 이 세계는 김신록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이름조차 남겨두는 걸 허하지 않는다. 진짜 이름은 내내 부르지 못하게 하였음에도.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린다. 단념을 모르는 목소리다. 끌어안고 있는 체온 또한 품에서 놓을 줄 모른다. 더더욱 끌어안고 두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완연히 사라지기 전에 잠든 그를 다시 제 두 눈동자 속에 고이 담아낸다. 이번에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지그시 깨문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건 애달픈 고해성사를 나타낸다.

 

 

 

Error!!

외부의 존재를 감지하였습니다!

배■을(를) 시■…니다. 프■세스 가동 앞으로 30초. 29, 28, 27…….

 

 

 

이 세계는 몇 번이나 반복돼. 저항하며 간섭하여도 너는 늘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곤 하지. 있잖아, 이번에도 너의 삶을 지켜내지 못해서 미안해. 내 불찰이야. 그럼에도, 나는, 너를, 여전히 포기할 수 없어. 옥색의 두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결의를 다진다. 네가 바라지 않아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더라. 옥색의 시선은 어느덧 허공에 뜬 영롱한 옥구슬로 향하였다. 내 소원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지만. 유려한 두 손이 사라진 품을 대신하듯 옥구슬을 조심스레 받쳐 든다. 나는 바라고 있어. 두 눈이 지그시 내리 감긴다. 옥구슬에 맞댄 이마는 애달픈 진심을 고하기 전 마지막 다짐을 나타내며…. 그러니까,

 

―다시 한번 네가, 내게 소원을 빌어주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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