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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좋아
맹효돈x김유리

익숙한 갈증이 또다시 신체를 범람한다. 이마엔 식은땀이, 시야는 흐려지고 목이 타들어 간다. 이젠 두 다리조차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하며 스스로 자조했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상태는 위험하다.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맹효돈은 그토록 미뤄왔던 결정의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어서 빨리 갈증을 해소하거나, 인적 드문 곳에서 홀로 죽어가거나. 누군가를 죽이거나, 나의 목숨을 포기하거나. 태초부터 그래왔었다. 저주받은 그의 종족은 타인의 목숨에 기생하며 질긴 생명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제 그토록 작을지언정 끊임없이 타오르던 불꽃조차 꺼질 순간이 온 것이다. 맹효돈이 마침내 힘없이 고개를 수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풀었다. 시체와도 진배없이 창백한 몸뚱이가 기어코 바닥을 향해 무너지고, 서서히 그의 눈이 감긴다. 그리고는…암전이다.


맹효돈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비친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뭐지? 내가 어떻게 살아있지? 그가 몸을 일으키자 어두운 방 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건 어항인가. 커튼 틈새로 스며드는 햇빛을 어항 속 금붕어의 비늘이 반사하고 있었다. 맹효돈은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긴 어디지?

“일어났어요?”


그는 화들짝 놀라 경계 태세를 취했다. 낯선 문으로 처음 보는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쟁반에 들고 온 컵 한 잔을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섰다. 차르륵 걷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맹효돈에게 닿으려 줄기를 뻗었다. 갑자기 밝아진 방에 얼굴을 찡그리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컵에 담긴 기묘한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잘 한다 맹효돈. 머릿속에서 그게 아니라고 외치며 맹효돈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맹효돈의 표정을 보고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여기 집주인이요. 마을에 들렀다 돌아오는 중에 길바닥에 쓰러져 있기에 그 모습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일단 우리 집으로 데려온 거예요. 어쩌다가 거기 쓰러져 계셨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어……감사합니다. 쓰러져 있었던 이유는 제가…….”


맹효돈은 말을 하다가 멈췄다. 이걸 말해도 되나?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았다. 맹효돈은 쫓기고 있었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아, 말하기 좀 그러시면 안 하셔도 괜찮으니까요.”


망설이는 걸 눈치 채고는 미안하다는 듯 냉큼 덧붙이는 모습이 고마워 맹효돈은 고개를 푹 숙였다.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을 집에 들인 것도 모자라 치료까지 해줬는데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꼴인데도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당장 집 밖으로 나가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여기며 그는 감사를 건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사람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요. 몸도 다 낫지 않은 것 같은데 당분간 여기서 지내다
가세요. 마침 혼자 사는 게 적적했거든요.”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푸른 수평선을 등지고 선 채 손가락으로 창틀을 톡톡 두드리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머리에 꽂힌 목련 위의 나비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정 싫으시다면 마을에”
“아뇨! 마을은 안 됩니다!”


마을이라는 단어에 반응해 소리를 질러버렸다.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저를 때리러 올 것만 같아 몸이 움찔 떨렸다. 상대방이 저를 쫓아내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차마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어 반사적으로 들었던 고개를 내려 우물쭈물 그릇을 바라보고 있자니, 터벅터벅 침대 옆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할까?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알겠어요. 그럼 우리, 당분간 같이 지낼 텐데 자기소개나 해볼까요? 제 이름은 김유리예요.
나이는……17살!”

그녀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하는 말에 맹효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람, 아니 김유리는 수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을 치료해준 것도 모자라 머물 곳까지 내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저 못지않게 수상했으나, 제 직감은 저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름 정도는 말해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맹효돈……입니다. 17살…….”
“동갑이네요! 우리, 말 놓을까요?”


맹효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 효돈아!”


세상이 순간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
마을에서 멀리 사는 것도 모자라 이런 외딴 바닷가 절벽 위에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더니 놀랍게도 여기 있었다. 김유리. 흔쾌히 말을 놓자 제안한 것도 모자라 함께 지내자 말한 사람. 그녀는 가끔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때마다 맹효돈은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싸워본 사람의 손이었다. 집에 놓인 레이피어 몇 자루가 그
증거였다. 맹효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장작을 팼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하는 재능이 없었다. 그녀가 이전에 뭘 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이대로 계속 지내다가는 평생 함께 살게 될 것 같다는 점이다. 평화에 찌들어 그에게 내려진 운명에서 벗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통 갈증이 일지를 않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입이 심심하면 마시라며
주고 간 병을 보며 그는 그녀가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끼룩끼룩.


시선을 돌려보니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비둘기 한 마리가 그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는 비둘기를 낚아챘다. 발목에는 익숙한 장치가 달려있었다. 언제부터지? 맹효돈은 황급히 비둘기를 저 멀리 던져버리며 날아오는 단검을 피했다. 쾅-! 하고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겨우 도망친 곳이 이런 외딴 집이라니. 멍청하네.”
“당신은 누구지?”
“널 잡으려고 온 사람.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뭐?”
“이 집주인. 너랑 연애라도 하나보지? 네가 오지 않으면 그 아이를 죽일 거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금, 뭐라고.”
“이름이 뭐더라……. 김유리?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아는 사람, 맞지?”


눈앞에 열이 몰렸다. 그러니까 지금, 나 때문에. 그는 눈을 깜박거렸다. 네가 구하면 된다. 네가 구한 뒤에 떠나면……. 떠나면? 그 뒷일은 일단 김유리를 구하고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쉽게 투항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숨어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맹효돈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 지옥에서 그가 어떻게 도망쳤는지 보여줄 차례였다. 김유리도 나갈 때 검 한자루를
챙겨 갔으니 버텨줄 거라고 생각했다.


-


그녀가 처음 태어난 곳은 바닷가 근처의 어느 마을이었다. 그녀를 사랑한 바다는 근처의 다른 인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을은 파도에 휩쓸렸다. 그녀가 바다로부터 도망쳐 내륙으로 들어가자, 바다는 성이 났다. 그래서 바다는 강을 부추겨 홍수를 일으켰다. 그녀의 부모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물었다.


‘이 아이가 어찌하면 편히 살 수 있겠습니까?’


들려오는 대답은 아이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물의 신께 바치겠다며, 수재를 불러온다며 그녀를 납치하고 없애려던 이들로부터 딸을 지켜냈다. 그런데도 너무나 불안해서 검을 쥐어 주고 가르쳤다. 그녀는 세검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비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해안 절벽의 꼭대기에 집을 짓고 혼자 살고 싶다고 하세요.’


그녀는 더 이상 남을 다치게 만드는 것이 싫었다.
‘엄마, 저는-’


부모님을 고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바닷가 절벽 위에서 혼자 살게요.’


어린 그녀에게 혼자 살면 괜찮다는 말은 그 무엇보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를 뚫고 혼자가 되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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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효돈은 산을 내려오다 고개를 돌렸다. 불길했다. 서둘러 김유리를 찾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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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져 있던 사람이 뱀파이어라고 알아봤던 건 아니다. 데려가고 보니 뱀파이어였다. 아는 이들 중에 뱀파이어가 없었다면 간호 중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지인들이 흡혈 욕구를 참고 싶을 때 식사대용으로 먹던 음료를 만들며 그런 생각을 했다. 뱀파이어라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아직 이름도 못 물어봤잖아. 그녀는 방을 나섰다. 최근 뱀파이어 관련 사고가 있었는지
찾아볼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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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슭은 난장판이었다. 혈흔이 여기저기 낭자했고, 피 비린내가 자욱하게 퍼지고 있었다. 시체들을 대충 흩어보니 그를 쫓던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더 있었다. 김유리는 두 집단이 싸우는 사이 따라오는 몇몇을 뿌리치고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는 흔적을 따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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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지내자고 한 건 외로워서였을까, 충동이었을까. 그녀는 새 동거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김유리는 혼자가 아닌 일상이 즐거웠다. 나중에 다른 친구들도 불러보자. 그녀가 간과한 것은, 그녀도 결국 이상한 미치광이들에게 쫓기는 처지라는 것이다. 다행히 두 집단은 서로 싸우느라 그녀에게 거의 신경을 쏟지 못했고, 그녀는 혼란을 틈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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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는 해변에 서 있었다. 손에 늘어뜨린 가느다란 레이피어를 타고 핏물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다가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핏빛이 된 목련에 달려있던 나비는 김유리를 빙글빙글 돌며 날아다녔다. 장식이 아니었던 건가.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김유리가 말했다.


“도망가.”
“…….”
“바다가 널 죽일 거야.”


맹효돈의 집요한 시선을 느꼈는지 김유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비가 불길하게 날아다녔다.


“효돈아, 나는 가지 않아.”


맹효돈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김유리는 바다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 집으로 가. 바다는 그곳까지 닿지 않을 거야.”

맹효돈은 나비를 잡았다. 김유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나, 네가 뱀파이어라는 사실 알고 있었어.”


순간, 파도가 김유리를 덮친다. 맹효돈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잡아당겨서 품에 끌어안고 버텼다.


버텼다.


물이 닿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바다는 그들을 피해 육지를 휩쓸고 사라졌다.


“효돈아.”


그는 안도감에 숨을 내쉬었다. 잔뜩 쌓였던 불안감이 훅 하고 내려갔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바다가…….


“고마워.”


김유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었다. 맹효돈도 마주 웃었다. 결론적으로 산발의 소년 두 명이 난장판이 된 바닷가에 서있는 모습이었지만, 이래저래 해피엔딩이었다. 둘은 노을을 등지고 집으로 향했다.
그 어떤 파도가 와도 이제 두 사람은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함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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