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하지 말고 대화를 하자
사리
독고미로x한이
이젠 두 다리조차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하며 스스로 자조했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상태는 위험하다.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독고미로는 그토록 미뤄왔던 결정의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음을 깨닫는다.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어서 빨리 갈증을 해소하거나, 인적 드문 곳에서 홀로 죽어가거나. 누군가를 죽이거나, 나의 목숨을 포기하거나. 태초부터 그래왔었다. 저주받은 그의 종족은 타인의 목숨에 기생하며 질긴 생명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제 그토록 작을지언정 끊임없이 타오르던 불꽃조차 꺼질 순간이 온 것이다. 독고미로가 마침내 힘없이 고개를 수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풀었다. 시체 와도 진배없이 창백한 몸뚱아리가 기어코 바닥을 향해 무너지고, 서서히 그의 눈이 감긴다. 그리고는.... 암전이다.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햇빛에 독고미로는 눈이 부신지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어코 다른 이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구나. 독고미로는 자신이 어제 죽을 운명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의 피를 마셨기 때문이니라. 죽을 뻔했으니 분명 이성을 잃고 누군가의 피를 남김없이 마셨겠지. 추악하기 짝이 없다. 그 와중에도 얼굴을 가리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있어 매스컴에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에 빠져있는 이기적인 자신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일어났어?”
독고미로의 상념을 끊은 것은 갑작스레 들어온 한이었다. 꿈인가? 독고미로는 눈앞에 한이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은광고를 졸업하고 연예계 활동이 바쁘다는 핑계로 한이를 피해 다닌 지 몇 달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이를 피해 다닌 이유는 단순했다. 절친했던 친구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었음에도 종족의 피가 그를 다치게 할까 봐 더 이상 다가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독고미로는 사실 한이에게 종족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에너미의 피를 마시는 독고미로를 목격한 한 플레이어는 에너미를 보듯 독고미로를 혐오가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독고미로는 한이가 그 플레이어처럼 행동하지 않을것이란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 몰라’하는 자그마한 불안이 그를 삼켰다. 그 결과 독고미로는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인 절친 독고미로로 남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하지만 죽기 직전 떠오른 얼굴이 한이라는 걸 깨달은 독고미로는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은 다 헛수고였다고 생각했다. 신께서 죽기 전 한이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걸까. 독고미로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으며 빨리 꿈에서 벗어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독고미로의 기다림의 끝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마에 얹어진 한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한이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독고미로는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방과 다른 가구 배치, 그리고 자연스럽게 방에 들어오던 한이. 자신이 있는 장소가한이의 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독고미로는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쓰러진 곳이 한이의 집이 근처였던걸까. 그래서 한이가 쓰러진 자신을 데리고 온 걸까. 그렇다면 왜 병원이 아닌 한이의 집에서 깨어난 걸까.
“한이야... 내가 왜 여기에...?”
“집에 돌아가던 길에 네가 쓰러져 있어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병원은 안된다고 부탁하길래 어쩔 수 없이 내 집으로 데리고 온 거야. 괜찮아지면 한번 병원에 가보는 건어떨까?”
“...알겠어.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금방 취했었나 봐. 내가 너에게 폐를 끼친 것 같네. 정말 미안해.”
“그랬구나. 난 괜찮아.”
독고미로는 자기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본인이 이상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한이도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변명을 들어주는 건 무슨 이유일까.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던 독고미로의 시선이 한이의 목 근처에 닿았다. 목폴라를 입고 있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밴드처럼 보이는 흰 것이 목 근처에 붙어 있는게 보이자 독고미로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내가, 이 저주스러운 피가 한이를 다치게 했구나. 독고미로는 자신이 최악이라고 생각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자신이 공복 상태에 이성을 잃고 있었다고 하나 한이를, 그것도사랑하는 사람을 건든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독고미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이에게 말을 건넸다.
“목에 밴드는 어쩐 일로...”
“이거 밴드가 아니라 파스야. 혼자 훈련하다가 목이 뻐근하길래 파스를 붙인 거야.”
“아... 그렇구나.”
독고미로는 저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혈향이 한이에게 강하게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이가 플레이어라도, 그리고 그동안 피를 마시지 못해 힘이 떨어졌다고 해도 본능만 남아 사정없이 공격하는 뱀파이어를 이기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이성을 잃고 한이의 목을 물어뜯어 피를 탐했겠지. 뱀파이어가 남긴 상처는 치유 아이템으로도 지울 수 없기에 분명 한이의 목에는 내가 남긴 상처가 있을 것이다. 독고미로는 당장이라도 한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었다. 이때까지 네가 믿어왔던 친구는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 살아가는 뱀파이어였다고, 그 진실을 숨긴 채 결국 너까지 죽이려고 했다고 독고미로는 한이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독고미로는 그럴 수 없었다. 한이가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독고미로는 한이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한이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독고미로는 한이의 집을 나설 때까지 그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독고미로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독고미로 휴식기임에도 불구하고 이계 공략, 스타 플레이어의 모범이 되다,’ ‘갑작스러운 이계 공략에 나선 독고미로. 그 이유는?,’
‘독고미로, 공략조에 숨겨운 애인이 있나.’
한이가 독고미로와 어색한 만남을 가진 뒤 처음 듣게 된 소식은 그가 이계 공략에 나섰다는 것 이었다. 독고미로가 염원했던 아이돌이 된 이후 한이는 빠짐없이 그에 대한 기사를 읽어왔다. 하지만 이때까지 읽었던 기사 중 이계 공략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 적이 없었다. 기사에는 스타 플레이어에 대한 찬양, 독고미로의 이계 공략에 대한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한이는 독고미로가 이계 공략에 나선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독고미로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 이유이니라. 하지만 왜? 한이는 의문을 가졌다. 독고미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때 한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쓰러진 독고미로를 발견한 것과 방심한 틈을 타 피를 내어준 것은 당황스러웠으나, 은광고를 졸업하고 난 뒤 황지호가 진족, 그것도 개천신화에 나오는 황호라는 점이 이보다 더 놀랄만한 사실이었고 그 황지호와 부반장인 조의신이 연애를 한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고미로가 뱀파이어라고 해도 이때까지 쌓아온 우정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독고미로가 불참했었던 동창회에서 조의신은 본인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들 조의신이 뱀파이어라고 해서 그와 함께 해왔던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의 반응을 본 조의신은 그제서야 이 비밀을 알리기 위해 많이 고민했었다고, 안심하는 듯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었다. 그렇기에 한이는 독고미로의 정체를 알았을 때 그가 비밀로 해야 했던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고, 언젠가 독고미로가 직접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줄 요량이었다. 오히려 한이는 독고미로가 자신의 연락을 피하다 못해 아예 연락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은광고를 졸업하기 직전에 독고미로가 보인 어색한 행동들이 모두 그의 정체와 관련된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독고미로가 보고 싶다. 독고미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이는 독고미로에 대한 생각이 늘어날수록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이는 한시라도 빨리 이 답답함을 해결하고 싶었다. 조의신에게 조언을 구해볼까? 같은 뱀파이어니 이런 일에 대해 좋은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이는 조의신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디바이스를 켰다. 하지만 때마침 온 메시지에 한이는 조의신에게 연락하려는 것을 멈추고 디바이스 창에 떠 있는 발신인의 이름을 유심히 바라보다 결심한 듯 답변을 보내고 나갈 채비를 했다.
“안 바빠? 진족이면서 한가로워 보이네.”
“아무리 바빠도 내 친우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보다 못하지.”
한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지호에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지호는 키득키득 웃으며 한이 앞에 찻잔을 두었고 한이는 한동안 찻잔에 든 라벤더 차를 가만히 바라봤다. 황지호는 그런 한이를 재촉하지 않고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조의신이 뱀파이어라고 말했을 때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했었지.”
“그래. 나는 조의신의 종족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만, 이것이 네 고민과 관계가 있나 보군. 그렇다는 건 독고미로와 관련된 것인가?”
“그건...”
“정곡을 찔렀나 보군. 독고미로가 뱀파이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겠지?”
“이미 알고 있었어?”
“내 학교의 학생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황지호의 모습에 한이는 약간 불만스러웠지만 이내 상관없다는 듯이 황지호를 바라봤다. 오히려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한이는 라벤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너한테 직접 말해 준 거야?”
“그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알아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뱀파이어들이 정체를 감추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황지호의 질문에 한이는 답을 할 수 없었다. 황지호는 답이 없는 한이를 뒤로한 채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조의신이 말하길 소수의 뱀파이어들은 타인의 피를 마시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한계까지 몰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공복의 상태가 되어 이성을 잃고 눈앞에 있는 자의 피를 빼앗는 것이 다반사, 그 과정에서 주변에 친밀했던 자가 죽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어린 뱀파이어에게 주입시켜 흡혈의 중요성을 알리고 훗날 깊은 인연을 만들지 못하도록 방지한다더군. 독고미로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조의신은 그 소수의 뱀파이어에 속해 있었다. 조의신은 본인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감추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조의신은 필사적으로 모두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조의신이 처음으로 등교 거부를 했을 때지. 조의신은 아마 내가 본능에 몸을 맡긴 뱀파이어 하나쯤은 거뜬히 막을 수 있는 진족임을 알면서도 이성을 잃은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조의신이 스스로 그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공복 상태의 조의신과 마주해 피를 내어주어 역효과를 낳을뻔했지만.”
“...”
“하하하!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군.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피를 뺏겨도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면 조의신이 어느 정도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의신이 이성을 잃고 공격한 건 그 이후에도 몇 번 있었지. 하지만 그때마다 아무렇지 않다는걸 보여주니 조의신도 점점 누군가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겨 모두에게 정체를 밝혔지. 결국 중요한 건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는 확신을 주는 거였다는 거다. 독고미로의 사정은 나도 모르겠다만 아마 독고미로도 그 당시의 조의신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만 가볼게. 급하게 가야 하는 곳이 생겼어.”
한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고미로를 만나야한다. 한이의 머릿속에는 독고미로를 찾으러 간다는 생각만이 가득 찼다. 황지호는 그런 한이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답을 찾은 모양이군. 예전처럼 독고미로와 대련을 할 생각인가? 그런 거라면 내가 심판을 봐줄수도 있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어.”
“그런가? 아 참. 은광고 정문으로 가보도록 좋은 일이 있을 거다.”
한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황지호를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이사장실을 나갔다. 황지호는 짐을내려둔 것처럼 가벼워 보이는 한이의 뒷모습을 보고는 디바이스를 켜 누군가와의 연락 기록을확인하며 키득거렸다. 독고미로는 은광고 정문 앞에 멈춘 채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설마 여기서 한이를 만나는 건 아니겠지? 독고미로는 황지호가 보낸 메시지를 사납게 바라봤다. 아무리 황지호가 황명 그룹의 총수라고 해서 자신의 그룹의 엠베서더를 만나고 싶다고 은광고에 부르는 것은 독고미로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황지호는 독고미로가 한이를 피해 다녔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이가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은광고에 자신을 부른 것에 독고미로는 황지호가 일부러 자신을 이곳에 불렀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다행히도 주말이라 한이가 있
을 확률이 적다는 것이 독고미로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독고미로는 발걸음을 옮겨 서둘러 이사장실로 향하려고 했다. “독고미로!”
강하게 독고미로를 붙잡은 한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독고미로는 순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벗어나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내 약간의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이에 독고미로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몸에 힘을 풀었다. 왜 네가 나보다 더 절박해 보이는 건지. 독고미로는 자신을 붙잡은 한이의 손을 맞잡았다. 한이는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숨을 고르고 있었고 독고미로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한이가 진정하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독고미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아무래도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앉아서 이야기할까?”
한이는 독고미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독고미로를 근처 벤치에 이끌었다.
“이계 공략을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다친 데는 없어?”
“응... 다치지 않았어.”
오히려 독고미로는 이계에서 에너미의 피를 섭취하며 몸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독고미로는 한이의 질문에 답하며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부러 나를 배려해 주는 건가? 독고미로를 배려하듯 천천히 근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한이에 독고미로는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져 갔다. “미안해.”
독고미로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한이는 말하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독고미로를 응시했다. 독고미로는 한이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미안해. 너를 계속 피해 다녀서. 그리고 너를 다치게 해서 정말 미안해. 독고미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독고미로는 마녀에게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처럼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할 수 없었다. 독고미로는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괜찮아.”
독고미로는 한이의 말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괜찮은 거야? 내가 네 피를 마신거? 널 피해 다닌 거? 아니면 너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거? 독고미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이를 바라봤다. 신뢰를 담고 있는 눈. 한이는 독고미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실망하지 않을것이다. 독고미로는 한이와 눈을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아아. 너는 언제나 올곧은 눈으로 날바라봐 주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나는 너의 그런 모습에 반했던 거야. 독고미로는 서글퍼졌다. 그리고 너는 이 감정을 핑계로 늪에 빠져 자멸하려던 나를 꺼내주는구나. 독고미로는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좋아해...”
“....”
“널 좋아해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널 피해 다녔어.”
독고미로는 자신이 하는 말이 갑작스럽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백제를 먹은 것처럼 자신이 담아둔 감정이 펑펑 터져 나오는 기분이 들어 독고미로는 멈출 수 없었다. 정말 최악이다. 독고미로는 자조했다. 독고미로는 한이에게 고백을 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미안하다고 빌어야 하는 상황에서 고백이라니. 한이를 봐라.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말이 없을까. 독고미로는 입술을 씹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한참이 지났을까 한이는 조용히 독고미로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자신의 이마를 독고미로의 이마에 맞대었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그 말이 더 좋은 것 같아.”
“한이...?”
“내 말 들어줄래?”
한이는 생각했다. 자신을 피해 이계에 들어갔던 독고미로에게 가진 감정은 단순히 쓰러질 정도로 피를 먹지 못한 친구에 대한 걱정뿐이 아니었다. 아무리 친구가 걱정된다고 해도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일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무엇일까? 한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공청훤 선생님을 향한 동경, 0반 아이들을 향한 감정과는 다른거라면 사랑밖에 없지 않은가. 분명 늦가을의 끝이 다가와 서늘할 터인데 왜 자꾸 더워지는 기분이 들까. 한이는 독고미로의 작은 고백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다 괜찮아지겠지. 독고미로의 불안과 우리의 관계는 앞으로 천천히 해결하면 될 것이다. 한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독고미로에게 말했다.
“초라한 고백이라 부끄러웠는데 네가 받아줘서 정말 기뻤어. 그다음에 좋아하는 사람의 피를 마셔달라고 권유한 건 정말 너무했지만.”
추억을 회상하던 독고미로는 말을 끝맺자마자 한이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며 웃었다. 한이 또한독고미로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독고미로의 머리를 정리했다. “그래서 싫었어?”
한이의 말에 독고미로는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독고미로는 서운한 듯 한이의 목에 얼굴을 묻고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왔다. 자신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독고미로가 매우 절망적이고 죽을 것만 같아 보였던가. 한이가 피를 마시라며 목을 내밀었을 때 독고미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기세였고 덜덜 떨면서 한이가 유리 공예품이라도 된 것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한이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이 아팠고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본인이 더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이제는 독고미로가 한이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이는 이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한이는 이런 관계가 계속되길 바라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대로 독고미로에게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