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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緣

대장
김신록x조의신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거 같다.

 

등을 쇼파 등받이에 푹 파묻은 조의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공식적으로 황명재단 이사장 사택은, 그리고 아는 사람만 아는 황호저(邸)는 조용했다. 황호는 황지호의 일정이 있다고 했다. 황지호와 황유호가 아닌 다른 분신들은 특별한 용건이 없는 한 저택에 오래 머물지 않으니 애초에 별로 기대도 안 했었다. 적호나 백호도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은호를 보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별채로 찾아갈 일이었다. 그리고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일었다. 조의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을 은호에게 들려주면 일이 터무니없이 커질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 조의신은 응접실 쇼파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뜻밖의 방문에 올무만 신이 나서 꼬리를 흔들었다.

 

조의신은 올무를 무릎으로 올려주며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건국신화에서부터 언급되는 연륜 있는 호랑이들에게 상담할 것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급한 일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자리를 마련해 전해야 하는 것도, 위험한 것도 아니고 꼭 해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돌발적으로 일어난 현상에 대한 조의신의 의문을 해결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호랑이들에게 상담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럴 시간에 겨울을 맞아 특별히 더 포근폭신해진 올무의 애교를 받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인지도 몰랐다.

 

-그치?

-왕!

 

앞 뒤 맥락을 전부 생략한 의미모를 말에도 올무는 밝게 대답했다. 그렇다는 뜻인 거 같다. 눈을 맞추고 말을 거는 것이 기분 좋은 듯 올무는 한층 더 반짝거리는 눈으로 조의신의 품에 파고들었다. 조의신은 사양하지 않고 양껏 올무의 등을 쓰다듬었다. 우리 올무는 역시 천재인게 틀림없다.

 

그렇게 넋을 놓고 올무에게 신경을 쏟길 얼마간, 조의신은 미묘한 표정으로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반지처럼 동여매진 붉은 실이 보였다. 올무의 흰 털 사이로 한 가닥 붉은 것이 섞이니 눈에 띄었다. 올무는 아까부터 신경도 안 쓰는 걸 보니 안 보이는 것 같았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섬유가 감겨있는 게 아니기도 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기 있었다. 만져지는 것 같기는 한데 당겨지는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움직임에 거추장스럽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양 시침을 뚝 떼고 있는 것을 보고 조의신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이 쯤 되면 싫어도 눈치챌 수 밖에 없었다.

 

운명의 붉은 실. 월하노인이 엮는 부부의 인연.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본인 눈에 보여도 되고 이런 건 아닐텐데. 귀문을 보는 렌즈 같은 특별한 아이템을 쓴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인연을 상징하는 실이 보이는 것을 축복이나 저주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실을 따라간다고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상위존재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현실에 개입하는데 한계가 있는 분들이라면서. 이런 걸 시쳇말로 재능낭비라고 하는거다. 아닌가? 오히려 보이는 거 말고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으니 작은 개입이 맞나...?

 

올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손으로는 자연스럽게 귀 사이나 등을 쓸어주고 귀여워하면서도 빈 손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조의신 때문이었다. 신경이 죄 손바닥으로 쏠려 있는게 빤히 보이는데 그렇다고 안 놀아준다고 방해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올무의 귀가 쫑긋 섰다.

 

-왕!

 

거실로 익숙한 기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조의신은 올무를 한 번 바라보고 거실 쪽을 바라봤다. 거실로 들어온 이도 조의신과 올무를 바라봤다. 조의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여 올무는 눈치껏 비켜줬다. 비록 조의신이 기다리던 신화계 호랑이 넷은 아니었지만 이 후예는 조의신과 사이가 좋았다. 공기가 분홍색으로 따끈해지는 그런 종류로 사이가 좋았다.

 

-김신록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왜 여기 혼자 계세요.

 

인사가 겹쳤다. 그래서 잠시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그 결과 이번엔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다녀왔습니다. 조의신 군한테 이런 인사를 하니 새로운데요.

-그러게요. 저도 어서 오시라고 할 걸 그랬나봐요.

 

둘 다 이 집에 거주하는 건 아니니까 다녀왔다는 인사도, 어서오라는 인사도 딱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슬쩍 내비친 생각은 진심이었다.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 의사도 충분했다. 서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둘 다 알았다. 그래서 굳이 말로 꺼내고 두 사람의 관계에 이름을 붙였다. 어딘가 한 구석이 간질간질한데 그게 기꺼웠다. 곁에 언제라도 상대가 올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게 번거롭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냥 가만히 웃었다.

 

-황지호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들렀는데 타이밍이 안 맞은 거 같아요.

-황호님께요?

 

김신록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굳이 황호를 지목하여 질문할 것이 있다는 것이 마음쓰이는 모양이었다.

 

-되게 사소한 거에요. 황지호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괜찮아요.

-...조의신 군의 '괜찮다'에 대한 학습된 불신이...

-애인 못 믿는다는 말 그렇게 대놓고 해도 돼요?

 

조의신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고 김신록은 그게 귀여워 웃었다. 웃음으로 떼우려고 하지 말라고 투닥거리는 시늉을 하며 쇼파로 자리를 옮길 때, 조의신이 딛으려던 발이 뭔가를 밟고 쭉 미끄러졌다.

 

-어?

-조의신 군!

 

순간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질 뻔 한 조의신을 김신록이 받쳤다. 다행히 둘 다 넘어지는 불상사 없이 조의신을 부축해 다시 세워 준 김신록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조의신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은데요...

 

영 시원찮은 대답에 김신록은 좀 더 캐물어야 하나 고민하며 조의신을 살폈다. 하지만 조의신의 대답이 신통치 않은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선생님 혹시 이거 보이세요?

 

조의신의 시선이 제 손을 잡고 있는 김신록의 손에 닿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파란.. 거요?

 

파란 거? 다소 뜬금없게 들리는 말에 김신록은 고개를 모로 꼬았다. 한참 생각하는 것 같던 조의신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조의신에게 보인건 한 가닥 붉은 실이었다. 그러니까 자기 것 하나만 보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김신록의 새끼손가락에 매여있는 실이 보였다. 붉지 않았다. 파랬다.

 

-조의신 군?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 이거 엄청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네?

-제 손가락에 붉은 실이 매어져 있는데요

-...

 

김신록은 순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인연을, 운명을 상징하는 실이었다. 그게 갑자기 보인다고 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닐 것이었다. 차원을 넘었다 한들 조의신은 이 곳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여러 관계를 다졌고 그 결과 인연이 싹튼 것인지도 몰랐다. 계속 맞잡은 손을 쳐다보던 조의신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그 표정엔 기쁨이 퐁퐁 흘러넘쳤다. 응? 기쁨이 넘쳐? 잠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김신록에게 조의신이 말했다.

 

-근데 선생님 손엔 파란 실이 매어져 있어요.

-파란 실이요?

-봉채에 들어가는 청실홍실 아시죠?

 

아. 김신록이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 조의신은 다시 한 번 기쁘게 웃었다. 한반도에서는 한 가지 색으로 죽 이어진 인연의 상징보다 청실홍실이 더 익숙했다. 서로 다른 색이, 다른 존재가 엮이는 것이 당연했다.

 

-선생님

-네.

-홍시 같아요.

-...조의신 군

-네.

-조의신 군도 마찬가지입니다.

 

푸흐흐.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을 꺼낸 두 사람은 말 없이 서로를 당겨안았다.

 

-당연한 거였네요.

-당연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안 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잖아요.

 

조의신의 말에 김신록은 작게 웃었다. 인연이니까, 운명이니까 당연하다고 말하기엔 조의신과 김신록은 서로의 많은 것을 바꿨다. 서로 얼기설기 기워 곪고 열이 나는 상처를 보여주었고, 같이 나아지려고, 낫게 하려고 분주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외면했던 것이었는데도.

 

-그렇군요.

-그래도 기분 좋네요.

-네. 저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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